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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Oct 05. 2021

[동화]  처음 쓰는 편지

나의 창작동화

                      처음 쓰는 편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온 것은 한 달 전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 지내고 있었다. 노인네 혼자 사는 것이 적적하다며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자는 아빠, 엄마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우리 아파트로 오게 되었다. 


  할머니는 시골집을 비워두고 옷가지만 챙겨 와 동생 은지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식구들이 아침을 먹고 모두 직장이며, 학교에 가고 나면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했다. 


  베란다에서 말라죽어가던 화분들도 할머니가 온 뒤로는 항상 파릇파릇 생기가 돌았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손빨래를 해서 그런지, 세탁기가 하는 빨래는 못 미더워하곤 했다.


  빨래를 할 때면 욕실에 커다란 대야를 놓고 쪼그리고 앉아 옷가지들을 손으로 빡빡 문질러가며 빨래를 했다. 구멍 난 양말도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여 척척 기워 놓았다. 바느질을 할 때면 언제나 눈알이 동그랗게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꺼내 썼다. 바늘에 실을 꿰려 끙끙 앓다가, 결국 텔레비전을 보고 잇는 나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장손, 이 실 좀 끼와 도고. 내사 마 눈이 나빠서 통 귓구멍이 비질 않네..."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부를 때는 '우리 장손.' 하며 불렀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귀찮더라도 바늘을 꿰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할머니의 부지런한 손놀림은 집안 청소며, 빨래 등을 금방 해치웠다. 그러고 나면 할머니는 더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해했다.


  오늘도 나는 할머니가 먹을 것을 사다 놓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니 기대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 할머니가 경로당에 가셨나?‘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잇는데 할머니가 돌아왔다.


  "우리 장손, 벌씨로 왔나? 배 고프제? 쪼매만 기다리래이, 할미가 감자 삶아 놨데이. 은지는 아까 전에  묵고 피아노 학원 간다꼬 나갔데이."


  나는 할머니가 주신 감자를 맛있게 먹고 나서 아침에 챙겨가지 못했던 숙제를 찾아보았다. 분명 아침에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숙제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늦도록 인터넷을 뒤져 찾아 프린트한 과학 숙제였다. 


  책상 위는 말끔히 치워져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에 책가방에 챙겨 넣으려다 깜빡 잊고 그냥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 책상 위에 있던 제 숙제 못 보셨어요? 프린트한 종인데."


  "뭐라꼬? 종이? 아까 내가 책상이 하도 정신 사나워서 치았뿌릿는데. 책들은 다 꽂았고, 몬 씨는 종이는 다 내삐릿는데. 와? 뭐가 없어졌나?"


  할머니는 방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책꽂이에는 거꾸로 꽂혀 있는 책들이 여러 권 보였다. 


  나는 거실 구석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을 뒤져 보았지만 쓰레기통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가 낮에 갖다 버렸단다. 나는 슬며시 짜증이 났다.


  "할머니! 왜 물어보지도 않고 버리세요? 에잇!"


  나는 할머니에게 잔뜩 골난 얼굴로 신경질을 내며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저녁에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는  아파트 쓰레기함에 가보았지만 이미 청소차가 다녀 갔다며 빈 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쩔 수없이 다시 밤늦도록 컴퓨터에 매달려 숙제를 해야 했다. 할머니는 저녁 내내 나의 눈치만 보며 괜스레 거실을 서성거렸다.


  나는 방과 후 컴퓨터교실의 교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고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학교가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할머니에게 좀 갖다 달라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할머니? 저 진석인데요. 제 책상 위에 보시면 워드 자격증 실습이란 책이 있어요. 그것 좀 갖다 주실래요? 제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뭐? 워어 뭐라꼬? 다시 말해 보거래."


  할머니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할머니는 한참이 지나서야 교문 앞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할머니의 가슴에는 책들이 가득 안겨 있는 게 아닌가? 대여섯 권은 되어 보였다.


  "이 할미가 돋보기를 어데다 놓았는지 몬 찾았는기라. 그래서 마 책상 우에 있던 책들을 모조리 갖고 안 왔나. 여기서 한 번 찾아 보래이."


  나는 할머니가 가져온 책들을 훑어보았지만, 내가 가져오라고 한 책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짜증이 났다.


  "할머니, 내가 가져오라는 책은 안 가져오고, 엉뚱한 것들만 가져왔잖아요! 에이, 그냥 가져가세요."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할머니를 두고 교실로 달려갔다. 건물 입구를 들어서며 잠깐 교문 쪽을 쳐다보니, 할머니는 책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그냥 서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나의 방구석에 엎어져 있는 컴퓨터 교재를 보았다. 나는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가서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할머니, 책 여기 있잖아요. 방바닥에 있었는데 할머니는 왜 못 보셨어요?"


  할머니는 우물쭈물 말을 더듬거렸다.


  "그랬나? 내가 방바닥은 못 봤제. 그기 거기 있었나? 할미가 정신이 없어 몬 본기라. 우짜노? 책 없이 공부는 우째 햇노?"


  저녁식사를 마친 할머니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며 계속 한 숨만 내쉬고 계셨다.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떠들고 있었는데도, 할머니는 자꾸만 한숨만 푹푹 쉬었다. 나는 컴퓨터를 하면서 낮에 할머니에게 신경질을 부린 것이 마음에 걸려 기분이 영 찜찜했다.


  다음날, 내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 순대 접시 하나만 놓여 있었다. 나는 손을 씻고 나서 순대를 먹고 있는데 할머니가 돌아왔다. 


  "할머니, 어디 갖다 오세요?"


  할머니는 아무 일 아니란 듯이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가 집에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딜 갖다 오시는지 나보다 늦게 들어오기도 했다. 


  현관을 들어서는데 매캐한 냄새가 났다. 무언가 타는 냄새였다. 나는 급히 주방으로 달려가 보았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찜통이 올려져 있었는데 연기와 냄새는 거기서 나고 있었다. 나는 급히 불을 끄고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에구머니나, 내 정신 좀 보래이. 이를 우짜꼬."


  등 뒤에서 할머니의 다급한 발걸음과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은지 방에서 나왔다. 할머니는 찜통을 들고 부리나케 욕실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방에서 뭘 하느라 빨래가 타는 줄도 몰랐던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오른쪽 귀에 꽂혀 있는 연필이 눈에 들어왔다. 왜 연필을 귀에 꽂아 두었을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며칠 뒤, 할머니는 더 큰 일을 벌이고 말았다. 저녁에 엄마가 회사에서 돌아와 빨래건조대를 보았다. 엄마는 건조대에 널려 있는 자신의 옷을 보고 정말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이 놀라서 소리쳤다.


  "어머나! 이 옷을 누가 빨았어? 이 옷은 드라이 맡겨야 하는데. 이걸 어쩌면 좋아."


  물론 그 옷은 분명 할머니가 오늘 낮에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빨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거실에서 얼굴이 노래진 엄마를 바라보며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머니, 이 옷은 집에서 빨면 안 되는 옷이에요. 이거 비싼 옷인데, 아휴! 내가 세탁소 갖다 줄려고 따로 놓아두었는데. 여기 물세탁 금지라고 씌어 잇잖아요. 이를 어쩌면 좋아..."


  엄마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옷을 들고 거실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너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엄마는 아무 죄 없는 내게 신경질을 부렸다. 할머니는 말없이 서 있다가 슬며시 은지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도 빨래를 들고 한숨만 쉬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혼자만 거실에 남아 있었다. 거실은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만 가득 차 있었다.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다. 아파트 화단에 있는 은행나무 잎사귀들도 점점 색깔이 노랗게 물들어 갔다. 나는 거실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구멍 난 양말을 깁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황금빛 들판을 보고는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야아, 우리 장손, 저 거 쫌 보래이. 올해도 풍년이라 카네. 사람은 역시 흙을 밟고 살아야 되는기라. 야동 댁도 꼬치 농사 잘 지었는가 모리겠네. 내도 시골에 살았으몬 지금쯤 꼬치 딴다고 바쁠낀데. 후유, 지금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잇는지 모리겠네..."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다음날, 결국 할머니는 시골로 돌아가시겠다고 말했다. 혼자 사시면 외롭고 힘들다며 아빠와 엄마가 말렸지만, 할머니는 성냥갑같이 답답한 아파트에 갇혀 사는 것 보다야 공기 좋은 시골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자주 시골로 놀러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도 한 번씩 올라오겠다고 말하며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겼다.


  할머니가 다시 시골로 가는 날,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 할머니를 배웅했다. 할머니는 우리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는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도,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지 연방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은지와 나는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할머니도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를 태운 아빠의 차가 떠나고 엄마와 은지는 아파트로 올라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웬 할머니가 옆 라인에서 뛰어나왔다.


  "에구, 벌써 갔나 보네... 뭐 그리도 빨리 간 겨?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더 볼라고 했더니만..."     

  이웃집 할머니는 아빠의 차가 떠난 길을 보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니가 진석이구먼... 니 할미한테 야기 많이 들었구먼. 얼매나 손자 자랑을 하던지... 그놈 잘~ 생겼네. 겨우 친구  하나 생겼나 했는데,  후딱 가버리다니..."


  이웃집 할머니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할머니의 뒷모습이 허전해 보였다.


  '할머니에게 친구가 있었던가?' 


  나는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다가 편지함에 꽂혀 있는 편지를 한 통 발견했다. 편지를 꺼내 보았다.     

  내게 온 편지였다. 글씨가 삐뚤삐뚤 연필로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말 글씨가 엉망이었다. 발신자를 보니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안 소녀'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굴까? 모르는 사람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반 친구의 이름은 아니었다. 정말 은지보다도 글씨를 못썼다.


  나는 궁금해서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었다. 하얀 편지지에는 역시 연필로 써진 까만 글자들이 삐뚤빼뚤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장손 보거래이 할미가 세상애 태어나서 첨으로 편지를 써는기라 너거 할아버지가 사라 잇엇으몬 조을낀대 그라먼 내가 너거 할아버지한태 자랑이라도 할수 있을낀대 그래도 이 할미는 우리 장손한태 편지를 썰수잇어 괘안타 할미는 묵고 사는거시 바빠서 공부는 몬햇는기라 그래서 저번애 니 책도 못 차자주고 미안하대이 아파트 복지간에서 내개 한글을 가르처주시는 선상님이 숙재를 하라고해서이러케 편지를 썬단다 우리 장손은 커서 곡 훌룽한 사람이 되거래이  우리 장손은 집안의 기둥인기라 그라이까내 공부도 열심이하고 밥도 마니 먹어래이 오늘은 마니 못 써갯대이 다엄애 공부 더 해서 다시 또 편지 보내주깨 잘잇거래이. 할미가.'


  나는 그제야 할머니가 글자를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숙제도 버리고, 책도 못 찾고, 엄마의 옷도 물빨래를 해서 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할머니가 글자를 몰라 얼마나 불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떠나신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미 아빠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은지의 동화책이라도 몇 권 보내 드려야겠다고, 할머니에게 답장을 꼭 해야겠다고. 그리고 보내는 사람 이름에는 이렇게 써야지... 


  '할머니의 장손 진석 드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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