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 진 Nov 09. 2021

나 만의 빨간 날

살면서 기억해야 할 특별한 날...

                         나 만의 빨간 날 



 11월의 찬 바람이 매섭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하고,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벌써 낙엽도 길거리를 떠난 지 오래고... 


  다른 달과 달리 11월에는 빨간 숫자가 없다.  국경일이니 명절이니 하는 날이 없지만, 내게는 빨간 날이 하나 있다.  나만의 빨간 날... 11월 10일,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1985년,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명색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누구나가 지켜야 할 신성한 국민의 3대 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이제나 저제나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초여름의 시내 다방에서였다.


  입대 날짜를 기다리며 이리저리 심심해 죽으려고 하던 차에, 친구의 전화를 받고 시내에 있는 '사보이'란 이름의 다방으로 갔다. 나는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당시 대학생들에게서 유행처럼 번지던 남대문 패션, 쉽게 말하자면 검은색 물들인 군복을 입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대구의 찌는 듯한 여름 날씨에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면 땀이야 좀 나겠지만, 그래도 어쩌랴! 학생답게 스포티하게 입고 다녀야지... ㅋㅋ


  대구 촌놈이 서울까지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싹싹한 서울 말씨 쓰는 여학생들과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미팅이라는 것을 하고, 신촌 대학가에서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며, 돼도 안 한 시국을 성토하며, 별로 해보지도 않은 데모가를 부르며, 자리잡지 못한 떠돌이처럼 학교생활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에라! 군대나 가자...


  이렇게 하여 나라의 부름을 받고 기다리다 지쳐 낮잠을 자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떡, 아니, 여학생이냐!!!


  다방을 들어서니 무엇보다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가웠다. 친구는  여학생들과 함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모두 세명이었다. 나는 친구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며 몇 마디 거들었다. 그녀들은 부산에서 대구로 유학 온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먼저 미팅을 했던 여학생들이었는데, 그날 다시 만난 것이라고.


  그녀들은 한눈에 뿅 갈만한 얼굴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나는 특별한 관심도 없이 그저 그런 말들을 주워섬기며 시원한 콜라만 마셨다. 한낮의 열기가 사라질 무렵, 우리는 돼지갈비를 파는 팔군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때, 나는 한 여학생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맛있는 돼지갈비에 쓴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녀에게 많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귀신 낮밥 주워 먹는 소리라고 할 그런 이야기들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녀를 붙들고 자신에게 취해서였는지, 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취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입을 열심히 놀려대었다. 무슨 말들을 지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인생이 어떻고, 시국이 어떻고,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어떻게 살 것이라는 둥...


  그녀는 열심히 들어주었다. 어쩌면 들어주는 척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더욱 신나게 지껄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는 막판에 나는  그 잘난 스타일을 확 구겨버리고 말았다.


  부어라, 마셔라,  인류의 적 마셔서 없애버리자... 위하여!!! 연방 팔운동을 하면서 신나게 마신 것들을 몽땅 화장실에다 반납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으으 쪽 팔려라... 에구, 부끄러워라...


  우리는 그렇게 처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서로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예전의 수없이 많이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들을  헤어지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듯이 그렇게... 스쳐간 바람처럼...


  아이고 머리야! 오늘 마신 술을 반납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놀았다...


  나는 대구의 50사단의 신병훈련소에 입소하면서 자랑스러운 대한의 국군이 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똥 방위가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겠냐만은... 하지만, 북한이  왜 아직 남침을 못하는지 아는가? 바로 전국에 구석구석 퍼져있는 방위들이 지역방위를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방위들이 가지고 다니는 도시락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비공식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만... 나도 사실 잘은 모른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나는 이런 군가를 부르며 신병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대구 근교에 있는 팔공산 예비군 종합훈련장에서 복무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총 들고 밤새워 보초서는, 그런 군인이었냐고? 아니다. 빵과 과자, 음료수 파는 PX에 배속받았다. 나는 14개월 동안 콜라 팔고 빵 파는 장사꾼 군인이었다. 흠...


  아침 일찍 집 근처의 동사무소 앞에 세워둔 예비군 수송차량을 타고 팔공산으로 출근하여, 저녁에 산길을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퇴근을 하였다. 버스가 예비군 종합 훈련장까지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산길을 한 시간 가량 걸어서 내려와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빵 팔고,  도시락 팔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마지막 단풍잎이 떨어질까 말까 설레던 늦가을  어느 날,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어이, 군바리.  페스티벌 한건이 있는데 이번 일요일 시간 어때?"

  "야아~~, 빡빡머리라도 좋다는 여자라면 얼마나 별 볼 일 없겠냐..."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승낙을 하고 말았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어느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가을의 남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옆구리가 시큰거리는 게, 추워서 벌벌 떨 지경이었으니... 빡빡머리의 페스티벌 파트너라...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심심한 일요일보다는 낫겠지...


  나는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샴푸로    감고 얼굴에 남성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스킨도 발랐다. 그리고 대학 입학식 때 부모님이 사준 겨울 콤비를 입고 페스티벌 파트너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날은 1985년 11월 10일, 일요일이었다. 약속시간은  12시, 정오였다. 아, 그 다방 이름이 뭐더라? '커피동네'였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있는 다방이다. 나는 짧은 머리를 휘날리며 그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먼저 도착했었는지, 그녀가 먼저 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우리는 다방에서 만났다. 아, 그런데 이게 웬 하느님이 맙소사 하는 걸까? 


  그녀는 내가 몇 개월 전에 그 잘난 이빨을 까다가 마지막 오바이트로 망신당한 여학생이 아닌가!


  그때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녀는 안경을 끼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어디서 볶았는지 뽀글뽀글하였다. 얼굴은  갸름해 보였고, 눈두덩이가 약간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시다가 페스티벌 파트너로 저 같은 군바리를 데리고 가시게 되었습니까?"

  "아 예...."


  그녀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는 잇지 못했다. 하긴, 내가 머리 깎기 전의 얼굴을 생각했다면,  지금 그녀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실망, 아니, 충격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다른 방위들보다는 그래도 머리카락의 길이가 좀 더 길기는 했지만, 여름 뙤약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색에다가, 비록 콤비를 입었지만 빡빡머리에 그렇게 잘 어울리지는 않았으리라...


  페스티벌은 가야 하고 데리고 갈 남자는 마땅히 없고,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일회용 대일밴드로 나를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나는 상관없었다. 심심한 일요일 오후를 집에 있느니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점심을 분식집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페스티벌 시간까지는 시간이 약간 남아있었으므로 가까운 화랑으로 그림을 감상하러 갔다.


  전시회를 하는 화백은 일 년 전, 겨울방학 때 두 달 동안 내게 그림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나는 그림에 취미가 있었으나 정식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늦게라도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동안  'ㅇㅅ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때 나는 데생, 수채화, 유화를 배웠다. 속성으로 말이다...  마침 그 스승이 전시회를 한다기에 이번 기회에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키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빼빼 마른 몸매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래머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얼굴과 몸매 그것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시간에  맞춰 페스티벌 장소로 갔다. 무슨 디스코텍을 빌려하는 것 같았다. 입구에서 그녀는 꽃값을  자기가 지불했다. 사실 나는 이런 페스티벌에는 처음이라 내가 꽃값을 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내가 답답해서 자기가 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3학년인데  이번 페스티벌의 제목은 4학년 선배들의 졸업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과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거기에는

지난번에 사보이 다방에서 만난 여학생도 있었다. 


  드디어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음악이 흐르고, 분위기는 고조되어갔다. 나는 앞에 놓인 맥주를 열심히 부어마셨다. 군바리 처지에 이런 맥주와 안주를 먹기가 어디 쉬우랴 하면서... 디스코 음악이 나오면 우리는 홀로 나가서 어색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고, 부루스 음악이 나오면 도망치듯 달아나는 그녀를 붙들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엉덩이가 뒤로 십리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멀찌기 빠져서 엉거주춤한 그녀를 잡고 나는 간신히 아는 기본 스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사실 애인을 파트너로 데리고 온 다른 커플들보다는 우리가 훨씬 어색했지만, 그래도 그네들이 하는 것은 우리도 다 했다. 


  축제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온 나는 열심히 마신 맥주의 취기 때문인지, 쌀쌀한 초겨울 날씨가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정중한 제의를 놀란 토끼처럼 화들짝 거절하고는 버스를 타고 휑 하니 가버렸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창 밖에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불빛들이 하나, 둘 식 꺼져가고 있었다. 어쨌던 하루를 여학생과 함께 즐겁게 보냈다. 아,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말이다... 안경을 끼고 있었고, , 머리는 파마를 했었고, 또... 


  왠지 가슴속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가 완전히 털어지지 않은 느낌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만났던 수많은 여학생들은 이런 느낌을 주진 않았는데... 


  어느새 세월이 후딱 흘러 30여 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녀는 이제 그때의 청순한 그녀가 아니다. 씩씩한 두 아이의 엄마로서 부실한 집안의 또 하나의 기둥이 되어 비바람과 폭풍우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건너왔다. 


  먼 훗날, 그녀는 내가 처음 청바지에 검정 물들인 군복을 입고 사보이 다방을 들어서 걸어올 때,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거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찬란했던 후광은 어딜 갔는지 , 그녀는 가끔 나에게 푸념과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청춘을 돌려달라며... 


  어쩌랴~ 나도 힘이 없는 걸... 마저 살아야지... 우짜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의 십자매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