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기다리는 시간...
아버지의 십자매들
지난주, 부모님 집에 잠시 들렀다. 현관을 들어서면 언제나 새장 속의 새들이 마치 나의 방문을 반기듯 열심히 쫑알쫑알 지저귄다. 그들이 현관 입구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1년이 된 거 같다.
누군가 골목 입구에 커다란 새장을 버려두었는데, 아버지 눈에는 그게 멀쩡해 보였는지, 집으로 가져와 깨끗이 청소해서 다음날 그걸 들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에 있는 새를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평소 새를 키우고 싶어 하던 아버지는 새똥 냄새를 싫어하는 어머니 눈치를 보다가 마침 기회를 잡은 듯이 주운 새장을 들고 얼른 새를 사러 간 것이다. 비록 줍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걸 갖다 주면 단 몇 푼이라도 깎아주지나 않을까 싶었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가게 주인은 중고 새장을 살 생각 없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기껏 힘들게 들고 온 보람이 없어진 아버지는 결국 한 쌍의 십자매가 든 새로운 새장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져간 새장은 몸집이 좀 큰 새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조그만 십자매를 키우기에는 창살 간격이 너무 컸다. 아버지는 어쩔 수없이 주운 새장을 가게 앞에 버려두고 왔다. 집으로 가져와 봐야 어차피 버려야 할 것이기에...
그렇게 산 십자매 한 쌍은 늘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서 별 탈없이 잘 살아왔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먹이통에 혹여라도 먹이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열심히 좁쌀을 채워 넣었고, 목이 마를까 물을 주고, 시원하게 목욕하라며 물통에 목욕물을 받아주기도 했다.
한가한 시간이면 새장 속의 새들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귀여운 자식새끼들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입으로 모이를 먹고, 물을 마시고, 횃대를 오르내리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아마도 추억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났을 게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늘 강아지며 새들이 같이 살았다. 강아지가 커서 어미가 되면 새끼를 낳곤 했다. 비좁은 개집 안에는 귀여운 새끼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며 어미 젖을 찾아 품으로 파고들었다. 창문 앞에 매달린 새장 안에서는 십자매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앉아 하얀 새알들을 품으며 어서 새끼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매일같이 내가 치워야 하는, 냄새나는 개똥이 있었고, 아침 해보다 먼저 일어나 떠들어대는 십자매들에게 모이를 주어야 하는, 귀찮은 일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늘 그들의 삶에서 나는 생기들로 가득 차 있었던 거 같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은 부모의 품에서 떠나 모두 각자의 둥지를 만들어 자신의 자식들을 키우며 살게 되었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부모님은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떠들썩했던 집 안이 고요해지고, 적막하기도 했을 터였다. 어쩌면 무언가 살아있는, 생기 있는 존재가 아버지에게는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십자매들이 자식의 빈자리를 대신해주길 바랬는지도...
십자매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버지가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십자매를 사 온 지 1년이 다 되었는데, 아직 알을 한 번도 낳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두 마리의 십자매는 사이도 좋은 것 같고, 둥지 안에서 자주 애정표현을 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알을 낳지 않는다고 했다. 새끼를 낳을 생각이 없어서 혹시 피임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혹여라도 석조라도 아닌지...ㅎㅎ. 나는 속으로 괜스런 생각을 아주 잠깐 하며 실없이 웃었다.
아버지는 기다림에 지쳐 아무래도 새들이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새장을 들고 예의 그 새를 샀던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새들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아... 이걸 어째... 이거 두 마리 다 수놈이네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고 한다. 새를 파는 주인이 어째 암수를 구별 못 했단 말인가. 어떻게 새 울음소리만 듣고 암수를 구분하는지... 아버지도 가만히 새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암수의 목소리가 다른 거 같았다고 한다.
십자매 한 쌍을 사 왔으니 당연히 암놈, 수놈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누가 그런 의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새를 파는 주인이 골라준 새인데 말이다...
물론 주인이 실수로 잘못 넣어주었겠지만, 아닌 경우도 있는 거 같다. 작은 욕심에 손님의 눈을 속이는 일을 나는 지난봄에 경험했었다.
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달콤한 히야신스 꽃향기를 맡기 위해 알뿌리를 사곤 한다. 굳이 화분에 심지 않아도 되니 그냥 기다란 주스 컵에 물을 담아 뿌리만 담가놓으면 된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봄햇살에 히야신스는 금세 잎을 쭉쭉 위로 밀어 올리며 키가 커졌고, 그 잎들 사이로 솟아 오른 키 큰 꽃대에 올망졸망 꽃망울들이 맺히더니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 온 집 안을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다지 길지 않은 봄 한 철, 히야신스는 내게 잠시 행복하고 기분 좋은 꽃내음에 젖어들게 해 주었다. 올봄에도 나는 아내가 시장 노점에서 사 온 히야신스 알뿌리 하나를 물컵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예전의 알뿌리와는 조금 다르게 잎이 많이 자라 있었다. 작년보다 알뿌리를 사 온 시간이 좀 지체되기는 했다.
히야신스는 매년 그랬던 것처럼 쑥쑥 자라났다. 잎들이 기다랗게 뻗어 올랐고, 금세라도 꽃대가 솟아오를 거 같았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나는 기대에 찬 눈길로 매일같이 히야신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꽃대가 올라왔을까? 아니었다. 여전히 싱싱한 잎들만 위로 삐죽 솟아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벌써 꽃이 필 때가 지났는데... 어째 꽃대조차 올라오지 않는 걸까? 알뿌리가 부실한 걸까? 히야신스는 열심히 내가 갈아주는 물만 먹고 꽃 피울 생각은 않고 이파리만 키우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잎들을 헤치고 가운데를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잎들 가운데 꽃대는 있었다. 처음 올라오는, 여리고 가녀린 줄기가 아니라, 굵은 꽃대가, 그것도 가위로 싹둑 잘린 채로, 나무 그루터기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히야신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꽃을 피울 수 없는 알뿌리였던 것이다. 노점 상인은 팔다 남은 알뿌리에서 꽃대가 올라오자 그것들을 팔기 위해 아마도 가위질을 했던 것 같았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알뿌리를 봉지에 담아 내미는 주인의 손에서 일말의 의심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그 상인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알뿌리를 판 게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양심을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 잘 들어 봐라... 저 두 놈의 목소리가 다르지?"
뭐, 내가 들어봐도 별 다른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놈이 그놈 같은데...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분명 십자매가 알을 낳을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또 기다려 봐야 하지 않을는지... 그 새 가게 주인이 암놈으로 바꿔주었는지, 아니면, 또 실수로 수놈을 넣어주었는지... 기다려 볼 일이다...
아버지는 또 부지런히 모이를 챙겨주고, 물을 넣어주고, 청소를 해 주겠지. 십자매들이 정말 알을 낳을 때까지...
나도 내년에는 제대로 된 히야신스 알뿌리를 사서 예쁘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봄날을 기다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