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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Oct 21. 2021

미처 물들지 못한 낙엽

가을, 정말 이별의 계절인가... 


                        미처 물들지 못한 낙엽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투명하게 들려온다. 어느새 가을인가. 드러난 살갗에 닿는 공기가 유리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소름이 돋는 팔뚝을 쓸어보지만 알싸하고 냉랭한 계절의 분위기는  쉽사리 걷어내질 못 한다. 


  한 줄기 바람이 '쏴아아-'하고 숲을 휘젓고 지나간다. 마른 나뭇잎들은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에는 유난히 더 크게 울어대는 것 같다. 마치 인생의 가을녁 언저리에 접어든 채 삶의 낭떠러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 모습과 많이도 닮은 거 같다.


  가을이 되면 푸른 나뭇잎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의 모든 양분을 다시 내주고 차츰차츰 야위어간다. 물기와 양분이 빠지면서 가벼워진 나뭇잎들이 차가운 바람에 서로 몸을 부대끼어 가을빛으로 붉게 물들어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거리에 누워있는 낙엽 하나를 줍는다. 가을이 새파란 나뭇잎에다 붉은색 물감으로 '휙!'하고 붓 자국을 내어놓았다. 이제 막 단풍놀이를 시작하려던 나뭇잎은 황금빛 축제에 끼여보지도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왜 서둘러 떨어졌을까? 나무가 그를 놓았을까? 이파리가 나무를 떠났을까? 아니면, 세찬 바람이 그들을 강제로 떼어놓았을까? 채 마르지 않은 습기가 눅눅하게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어느 가을날, 그의 사고소식을 들었다. 사회복지관에서 아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아직도 일 할 나이에 이른 퇴직을 한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노력했다. 힘 겨운 시간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며 기대와 꿈에 부풀었다. 폭풍우에 쓰러진 고목에 다시 잎이 난 것처럼 희망이 새파랗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말년에 그가 다시 찾은 삶의 보람을 하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복지관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어두웠던 지난날이 다시 밝아지고, 되찾은 황금빛 계절이 시작되려던 때에 덮친 날벼락이었다. 전화 수화기를 통해 기분 좋게 들려오던 그의 사람 좋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거 같은데...... 그가 바람에 날려 낙엽처럼 떠났다고 한다. 간다는 말도 없이.   


  팔공산 어느 자락 천주교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언덕에 그는 말없이 누워 있었다. 아름답게 물든 나뭇잎들은 가을바람을 따라 떠나버렸고, 차가운 겨울 산바람이 묘지 주변에 뒹구는 낙엽들을 파르르 떨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묘지 앞에다 하얀 국화를 꽂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엎드린 손바닥에 눌려 바스락거리며 마른 낙엽이 만져져 가만히 그것을 주워 들었다. 한때는 푸른 색깔로 싱싱하게 숨쉬었을 이파리는 이제 낙엽이 되어 황량한 묘지 주변을 떠돌며 망자를 위로하는 듯했다. 손끝으로 힘을 주니 낙엽은 가볍게 부서져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새롭게 찾은 삶을 미처 아름답게 물들여보지도 못하고 그는 팔랑팔랑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가 날아간 먼 하늘 끝에는 편안하고 고통 없는 세상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의 무덤 앞에 서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까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허. 다음에 만나 소주 한잔 합시다..." 


  그의 목소리가 따뜻한 웃음에 실려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남은 소주를 묘지 주변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나는 그의 술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는지, 그의 죽음이 새삼 서럽게 느껴졌는지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바람이 낙엽을 몰고 가듯 그와의 추억들이 하나 둘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다가 가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쩌면 객관적으로 불행했을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 들려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다 간 그는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어둠 속에서 용기 있게 걸어 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소풍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즐기다 떠난 그가 과연 불행하기만 했을지......      


  지금쯤이면 아마 그의 가을에도 단풍이 붉게 물들고 있겠지. 가을이 이별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는 가을이 되면 생각 속에서 그를 만난다. 언제까지 그가 내 기억 속에 살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길을 걷다가 떨어진 낙엽을 만나면 가만히 주워서, 


  "어르신. 어디 가서 소주 한잔 합시다..." 하고 중얼거릴 것 같다. 그와 나의 얼굴이 단풍잎처럼 빨갛게 물들 때까지 가을에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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