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 진 Oct 19. 2021

그녀의 이름

밤을 지새우게 하는 존재...


                         그녀의 이름은......  



  그녀 때문에 다시 잠에서 깼다. 벌써 몇 달 째인지 모른다. 가슴이 또 답답해졌다. 더웠다. 


  모두가 잠든 심야에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 창을 열었다. 시커먼 밤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왔다. 시원했다. 비가 올 거라고 하더니 바람 속에는 정말 습기가 잔뜩 묻어났다. 길게 한숨을 토하고 나니 조금은 답답함이 가셨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열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그러나 이마는 차가운 이성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언제부터 그녀가 내 곁에 있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항상 그녀가 내 주위에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내게 한 마디  말이라도 걸어주었더라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었더라면 내가 좀 더 일찍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텐데... 어쩌면 이미 그녀는 내게 많은 '러브 콜'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미련퉁이처럼 눈치가 없었던 것일까? 


  그녀는 언뜻언뜻 내 눈앞에 모습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애정은 온통 다른 곳에만 쏠려있었다. 빛나고 화려한 세계를 꿈 꾸며 아름드리나무에 달라붙어 정신없이 도끼질을 했다. 주위의 다른 것들은 전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끼질에 지쳐 힘들어할 때, 그녀는 말없이 내 곁에 머물러 있기만 했다. 질투의 표정조차도 짓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언젠가 자기를 찾아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내가 배신을 당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들어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가 옆에 있어드릴게요."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공기처럼 그녀는 항상 내 옆에 있어주었다. 무색무취의 산소처럼 나를 숨 쉴 수 있게 해 주고, 피로에 지친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녀는 넓은 가슴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는 눈물도 흘려주었다. 간혹 내가 화가 나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낼 때도 그녀는 눈을 꼭 감은채 기꺼이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거친 내 손길에 그녀는 점점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피부도 거칠고 눈동자도 초점을 잃어갔다. 어느 날, 그녀는 더 이상 나의 구박과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말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한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그녀보다 더 나은 존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녀가 필요치 않았다. 이젠 그녀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타는 욕망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그녀와 함께 있을 때의 포근함,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불태웠던 정열, 모든 것을 다 발산시켜버리고 난 뒤에 오는 가슴 벅찬 쾌감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가 아닌 다른 상대에게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섰다. 쉽사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쉽게 찾기는 찾았다. 다른 사람의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예전에 내가 데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잘 차려입은 옷에다 적당히 치장도 하고, 생기 발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니... 저것이 그녀의 본모습이었을까? 그녀는 다이아몬드의 원석이었다. 내 옆에 있을 때는 빛이 나지 않았다. 아니, 빛이 조금은 나긴 났었다. 정성을 들여 깎고 다듬고 갈아서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초췌하고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가서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남들에게 희망이 되고 사랑을 전하고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황홀하게 쳐다보는 내게 몰래 살짝 윙크를 했다. 저건 무슨 의미일까? 저 초롱한 눈빛이 내게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그녀의 눈에서 나는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다시 내게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내가 노력한다면... 


    지금 나는 그녀와 함께 있다. 이젠 거칠게 다루거나 함부로 대하진 않는다. 아직까지는 그녀가 아름답거나 우아하지는 않다. 세련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도 그녀도 행복을 느끼고 있다. 서로가 손을 맞잡고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빛나는 보석이 되리라 믿는다. 내게 행복을 주는 그녀는 틀림없이 나의 인연이다.


  .....


  ....


  ...


  ..


  .


  그녀가 내 귓가에 가만히 자기 이름을 말해준다. 


  "제 이름은 수필이라고 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입 안에서 맴도는 자갈치 곰장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