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도 지루하던 겨울이 어느새 사라지고 온 산에 하늘 거리는 하얀, 노란 꽃들이 만발하는 봄이 왔다.
이런 계절이 오면 가끔 생각나는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20대 젊은 시절의 군대에서 만났다. 그 시절은 꿈도, 생각도 많아서인지 진해의 어느 선창가 막걸리집에서 "생이 무엇 인지"부터
세상 모든 고민을 함께 할 정도로 의지하고 정 도 깊었는데 선배가 전역하고 나도 다른 부대로 이전하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나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가끔 생각은 있었지만 세상살이가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보지는 못하고 그렇게 잊힌 사람처럼 모르고 살아왔다.
선배와 연락이 다시 된 게 2000년 초쯤 인가!
서로가 헤어진 지 15년이나 지났고 내가 사업을 시작하여 동분서주하며 정신없이 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는지?
갑자기 연락이 와서"그냥 한번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라고 한다. 그동안 세상에서 무얼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만나자고만 하니 처음에는 반갑다기보다 약간의 긴장감이 생겼으나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긴장감은 야릇한 호기심으로 점차 변해 갔다
초등학교 담벼락에 개나리가 노랗게 피는 봄이 왔으나 아직 아침, 저녁이 쌀쌀한 그런 날이었다. 선배는 철이 지난 듯 한 오리털 파커를 입고 부쩍 말라서 인지 크지 않는 키이지만 왠지 흔들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뭔가를 신문지에 곱게 말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경남 하동부근 지리산 언자락에서 살고 있다"
"술을 많이 해서 몸이 좋지 않다" 하고는
신문지에 곱게 쌓여 있던 것을 불쑥 내게 내밀고는
"내려가겠다" 한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도 하여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붙잡아도 굳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흔들고는 하얀 벚꽃 꽃잎이 떨어지는 속으로 왔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선배가 주고 간 신문 뭉치를 조심해서 풀어 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커피로 인해 잊힌 지리산 야생차였다.
지리산 주변 절간에서는 차나무를 많이 심어 스님의 심신 수련을 위해 키우다 주인이 바뀌었던지, 절이 없어졌던지 하는 이유로 야생이 된 차나무가 아직도 꽤나 있나 보다.
매년 청명, 곡우 절기가 되면 선배는 야생하는 차나무에서 돋아난 새싹을 따다가 손수 덖어 만든 차 라 한다.
찻잎을 덖을 때는 일상은 실장갑을 끼고 하지만 가마솥의 정확한 온도를 느끼기 위해서는 선배는 수 백도가 넘는 가마솥 바닥을 맨손으로 찻잎을 덖어 만든다고 한다. 가마솥에 찻잎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손에 화상을 입는 일도 다반사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덖어진 차가 적절한 온도에서 타지 않고 봄에 피어난 새싹 같이 새 파란 초록의 색을 머금고 금방이라도 향을 뿜어 낼 수가 있다.
지리산자락의 조그마한 계곡 바위틈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심심유수로 차를 우리면 그 향이 천리를 간다 하여 작은 나무 상자 위에 천리향이라고 먹으로 단정하게 쓰여 있다.
아파트 창가에 눈이라도 내리는 어느 겨울날 찻잎 몇 개를 가만히 들어 차주전자에 넣으면 말라있던 잎새가 따뜻한 물속에서 봄눈 녹듯이 스르르 녹더니만 다소 거친 잎으로 되살아나 청아한 푸른 빛깔 뿜으며 지리산 구석, 구석의
지난 봄날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한 해가 더 지났던가...
지리산 쌍계사 입구의 벚꽃이 허 더러 지게 핀 어느 봄날
또 우연히 선배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평소 술을 즐기던 선배라 술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 유난히도 매섭던 지난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살랑이는 벚꽃 꽃잎과 함께 나에게 전해 왔다.
선배가 살던 지리산 언자락에서 천 이길 서울의 한 모퉁이까지 선배의 부고 소식이 달려오는데 한 계절이 걸렸지만 내 차 주전자 속에서는 선배가 주고 간 천리향이 천리 먼 지리산의 푸른 향을 뿜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