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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Feb 17. 2020

            잘 살고 있니?


나는 몇 년 전에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 날에 교회를 떠났다 아내는 교회 내에서 맡은 직분이 있어서 그 직분과 나름 본인이 하는 음악 동아리 활동을 다 마치고서 나보다 두 해나 늦게 교회를 떠나서 나와 함께 했다

내가 교회의 부적절한 모습을 보면서 늘 괴로워 할 때 아내는 항상 옆에서 아무말 없이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때로는 아내의 내 편을 들지 않고 제3자 모양으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서운함도 느낄때도 있었다 아내는 교회에서 권사의 직분을 맡아서 나보다 더 교회 내에서는

활동 폭이 넓었고 아는 사람도 많았다 지난날을 생각 해보면 내가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처음에는 진해에 살았으나 전근 때문에 6개월 만에 서울로 와서 나의 식구들과 살림집이 합하여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군인의 월급으로는 서울에서 집을 구해서 살수가 없었다 그런 점도 있고 또 결혼을 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를 지방에서만 떠돌다 보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 병이 나에게도 생겼나 보다 그래서 서울 어머니 집에 들어 와서 동생 둘과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 교회를 나가서 아내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이후 나도 아내와 어머니의 인도에 의해 교회를 나갔다

아내의 교회 생활은 참으로 적극적이였다 또 교회에서는  좀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몇가지의

직분을 맞는게 통념적이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지난 30년 동안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래서 교회 내 웬만한 직분은 거쳤고 또 그 직분을 통해서 나름 열심히 봉사를 했다    

주일 날 아침이 되면 둘이서 집에 나와서 아내는 교회로 나는 성당으로 길을 나누어서 다녔다 나는 아내의 생활을 존중했고 아내는 어쩌면 성당에 가서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는 마음인지 몰라도 서로 종교에 대해서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성당을 나가고 거기서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나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내도

호기심이 조금씩 생겨나 보다 그래서 내가 성당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는 데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축하를 해줬고 가끔씩 성당 행사에도 참석을 하여 미사를 드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내는 무슨 확신이 생겼는지 아니면 내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알았는지 부부가 이렇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 좋지 않다면서 성당으로 옮기겠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 내려 놓을 때 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 농담인줄 알았다 어쩌면 나에게 교회는 세상 속의 또 다른 한 사회 라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교회는 우리 가족 다음으로 또 다른 가정과 같은 곳이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말을 깊이 있게 생각을 않하고 대강 듣고 혹 충동에서 이러나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결심은 확고 했다 다음해 연말이 다가오자 주위에서 다른 직분을 맡아 달라고

많은 요청이 들어 왔으나 아내는 않된다고 하면서 “좀 쉬고 싶다”고 그 말만 하면서 거절을 했다 그때까지는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만 했지 떠날 것으로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았다

아내는 년말의 마지막 음악 공연을 마치고는 음악을 함께 했던 동려들에게 말을 남겼고 또 동려들과 함께 했던 카톡 대화방에서 빠져 나왔다 지금도 생각 해보면 그 대화방에서 나올때는  

아내는 마지막 송별 말을 남기자 모두들 잘가라고, 건강하라고 하였지만 아내는 나름 지금까지 함께 살아 오면서 몇 번 보지 못한 비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회의 생활은 그런 것 같다 목사가 아무리 엉터리 설교를 하여도 또 적당한 비리가 있어도

가족과 같은 친구가 있고 하나님이 있기에 어려운 문제는 다 하나님에게 맡기면 알아서 해결을 해 줄것이라서 생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교회의 친구들은 멀리 사는 형제보다 나은 존재 일 것이다 그런 생활을 삼십년이나 해 온 아내가 나에게 온다는 결정은 정말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아내는 처음에 성당의 보수적인 태도와 율법을 중시하고 엄격한 격식에 어리둥절 했나 보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가끔씩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성지를 순례하고 또 수녀님을 만나면서 그들의 검소함에 차츰 적응을 해갔다

내가 성당에 와서 교육을 받았던 수녀를 만나기 위해서(발령으로 구미성당으로 이전 하심) 구미를 방문하고 그분을 만날 때는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어느날은 수녀님이 구미에서 서울 다녀가신다고 연락이 오면 아내는 서울역까지 나가서 수녀님을 기다리고 함께 있을 때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서울역 근처 후암동 쪽방촌에  사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봉사를 나간다  그 곳은 수녀원에서 봉사를 주관하는 곳인데 수녀 두분이 나와 계신다 그 두분 수녀가

음식을 만들고 반찬을 준비하고 식자재를 씻고 설거지를 다 하기는 어려워서 일손을 도와주기 위해서 일년이상 나가고 있다 아내는 그곳에서 일을 하다보니 여러 가지가 부족한 것이 눈에

보였고 어느날 아내는 나에게 그 봉사관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재정 지원을 하자고 제안을 하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조금 보태고 있다 성당은 개신교처럼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서 강요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개신교에서 한 교회에만 봉사를 하고 십일조 헌금을 하는 대신에 사회에 필요한 곳을 찾아서 폭을 넓게 사용을 하자고 했다

아내는 금요일 날 그곳에 봉사를 갔다오면 무척이나 피곤하여 저녁을 먹자 마자 일찍 잠자리로 들려고 하지만 얼굴에는 무척이나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가끔 교회 친구들을 만난다  

수 십년을 한교회에 다녔으니 친구도 여럿히 있고 교회는 틀리지만 서로간에 연락을 하고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끔 같이 한다 교회 친구들을 만나면

교회를 함께 수십년을 다녔기에 서로 공통점이 많고 해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화두에 올라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 교회 친구들 대부분은 교회를 걱정하다가 교회의 불만으로 발전해가고 그러다 보면 다른 친구들까지 들먹이면서 비난을 했다 그럴때마다 그 친구들에게 “왜 그러고 있느냐 떠나면 될터인데...” 하고 거들지만 그들은 떠나지는 못하지만 교회 내가 온통 불만과 걱정 뿐이였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성도들의 삶이나 고달픔을 걱정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오히려 성도들이

교회의 운영과 목사등에 대해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둘이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행복의 만족도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다

교회를 떠나서 지금 이시간까지 왔지만 나도 교회 내에 있을때는 교회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 했었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할 때나 또 교회 친구를  만날 때나 성당에 대해서 어떤 불평도 없고 오히려 수녀님 이야기나 야외미사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교회를 떠나지가 한해가 지난 어느날 교회에서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집안에 아이 혼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은 우리집 행사에도 많이 와 주었고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서 혼례식장을 꼭 찾아 가야만 했다 예상처럼 식장에는 교회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교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이가 많으신 권사님이 내게로 와서

“잘 살고 있니”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아무말 없이 웃어 드렸다 그러자 권사님은 “모습이 보기가 좋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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