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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Feb 21. 2023

을지로가 언제부터 을지로였다고 #02

을지로는 왜 을지로가 되었는가

들어가며

'을지로'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앞서, '을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보려 합니다. 도심은 많은 것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에 공통분모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나가면 보다 이후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길'의 탄생과 변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2부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변화의 태동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변화의 지점은 산업화일 것입니다. 서구 물질문명에 찾아온 큰 변화는 인간의 세계관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지구상의 인간이라는 존재를 또 다른 차원에 위치하게 만들었습니다.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왔던 한반도. 하지만 오랜 시간 문명을 쌓아 왔기에 새로운 세계관을 수반해야만 가질 수 있는 기술문명의 유입은 극심한 열병을 야기했습니다.



서풍

17C 서학이 문인들을 중심으로 자생하며 조선에 자라났습니다. 유럽에서 전해진 학문이 사상과 종교가 되어 사회에 퍼져나가면서 조선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외부의 병원체에 면역세포가 대항하듯. 18C 김대건신부님이 최초의 조선 신부가 되고, 기존에 자리했던 성리학을 보완하거나 대체해 나가려는 움직임은 여러 박해 속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19C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과 근대 첫 개항이 시작되면서 서구에 본격적으로 문호가 열리게 됩니다.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산업화된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보국안민을 지향했던 농업국가인 조선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빈약한 처지였습니다. 

밀려오는 물질문명과 외국인들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치관을 변화시켰고, 세계관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도시 또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계천 이북에 집중되었던 지배층 중심이 청계천 이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가의 중심인 은 여러 국난을 거치며 임진왜란 이후 임시 거쳐로 쓰였던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겨졌습니다. 300년 만에 국가 지존의 집이자 정사의 중심이 청계천 이남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권세가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인근의 북촌과 서촌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새롭게 유입되는 외국인,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정착지는 청계천 이남의 남산을 중심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청계천 이북에서 이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공사관저(통감관저)터, 네이버지도, 2023


남산의 북쪽

오늘날 서울 중구 예장동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거점이 생겨났습니다. 예장동은 당시엔 왜장동이라고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남산기슭에 위치한 숭례문(남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기요마사 한양에 입성한 문이기도 하며, 남산능선에 위치한 평평한 터엔 일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백범광장이 되어있는 터는 동아시아를 침략하고자 하는 일본왕실과 군부에게 조선정벌의 의미가 깊은 곳이었습니다.


남산(목멱산) 일대는 한양에서 다른 산기슭에 비해 경제적, 계급적으로 약했던 몰락양반과 중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세력이 자리 잡고 확장해 나가는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덜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날이 맑아도 신이 없어 나막신을 신는다는 딸깍발이 선비들의 마을. 비가 오면 질척거린다는 진고개(현 명동 일대). 그곳에 새로운 이주민들의 터전이 되어 관저가 생기고, 거주지가 생기고, 시장이 생기고, 군사시설이 생기기기 시작했습니다. 


남산 북사면은 일본인들과 함께 유입된 자본과 기술로 정비되고 신문물이 유입되는 경성의 교두보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선진기지의 역할과 함께.


조선신궁, 남산, 1925, 서울역사박물관


황금정통

한양이 경성이 되면서 도시계획에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지리적으로는 혼마찌(현 명동)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며, 행정적으로는 일본식으로 변경되기 시작합니다. 「구리개길 銅峴」은 「황금정 黃金町」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보다 넓고 반듯한 신작로로 옛 한양의 길목을 대체되었습니다. 거리엔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자동차전차가, 인력거가 다녔습니다. 자유롭게 보행하던 사람들은 이제 인도라는 사람을 위한 길로만 통행하게 되었습니다.

 

보라색 점선 : 황금정통 / 붉은색점선 : 구리개길, 대경성부대관, 1936, 서울역사박물관


혼마찌(현 명동)에서 부터 광희문까지 이어진 '황금정'을 가로지르는 길은 「황금정통 黃金町通」으로 불리었습니다. 길을 따라 식민지의 중심도시의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였습니다. 사람과 물자에 따라 도시가 변해갔습니다. 청계천 남면소공인들은 여전히 삶을 이어가며, 새로운 기술들을 받아들이고 배후 제조지역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생필품부터 세공, 인쇄 등 다양한 산업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공장화되었습니다.



을지 + 로

1945년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침략자들은 돌아갔고 도시는 다시 한민족의 계획에 따라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30여 년간의 식민지배를 거친 한민족은 독립의 의지를 담은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체계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행정 등의 이유로 물리적인 변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간 쌓여온  피지배층으로서의 패배감을 떨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었습니다.


경성서울이 되고, 일본제국이 새롭게 지었던 길 이름들 중 중요한 거리의 이름들은 지역의 상징에 걸맞은 한국 위인들의 이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렇게「황금정통 黃金町通」은 「을지로 乙支路」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외적에 대항해 인류 역사상 손꼽힐만한 대승을 거두었던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독립된 한민족의 나라는 많은 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36년의 식민지배와 수탈로 황폐해진 경제상황,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로 희미해진 자존감, 제국주의는 막을 내렸지만 또 다른 강대국들의 대립이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스스로 내우외환을 하나씩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시점에 접어들었습니다.


가장 번화했던 서울의 대로는 우리에게 「을지로 乙支路」가 되었습니다. 길이 가진 색에서 지어진 이름에서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세긴 길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는 때. 앞에 있을 절망에 굴하지 않고, 마주한 시련을 더 큰 기회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들어가라는 길이 되어주길 바라며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첨부자료

도시의 망루, 을지예술센터 옥상, canon400D, 2022, 고대웅

조선신궁, 남산, 1925, 서울역사박물관

일본공사관저(통감관저)터, 네이버지도, 2023

대경성부대관, 1936,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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