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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Mar 10. 2023

을지로가 언제부터 을지로였다고 #03

예술이 기대는 거리


들어가며

'을지로'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앞서, '을지로'라고 불리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보려 합니다. 도심은 많은 것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에 공통분모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나가면 보다 이후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길'의 탄생과 변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3부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숙명

1945년 8월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다시 '빛을 되찾다'는 광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인들이 맞이한 현실은 난관이 가득했습니다. 해방전후에 밀어닥친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난이 지속되었고,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한반도엔 독립된 통일 정부가 자리잡지 못하고 분단되었습니다.


결국 강대국의 대립은 한반도의 남북전쟁을 야기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전쟁이 3년간 지속되면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1953년 한반도 전체에 휘몰아쳤던 전쟁은 승자 없이 휴전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한반도의 상황은 한 치 앞에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을지로 인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도시기반시설, 지역공동체, 정부의 역할. 살기 위해서 다시 일으켜야 했고, 이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선택이 아닌 숙명이었습니다. 이는 남북이 모두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이념을 가진 한 민족의 두 국가는 이제 누가 더 잘 살아가느냐의 경쟁으로 다음 장을 넘기게 됩니다.


종로와 을지로일대는 무너진 국가의 수도로 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가 쌓인 곳이었습니다. 다시 살아갈 희망의 불씨가 살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망가진 도시의 틈에 위치한 공터는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가 되어주었습니다. 도시 낮은 곳, 높은 곳엔 판자로 된 거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만 하는 날들이었습니다.

 

1950, 1960년대 청계천변의 판자촌 ⓒ서울역사박물관


도시 재건을 위해, 국가 재건을 위해 을지로 일대는 다시 한번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물자를 납품하는 시장제조업 단지가 대규모로 생겨났습니다.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을지로 일대는 도시의 중요한 유통과 제조를 담당한 지역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정 기술, 모여든 인력을 기반으로 점차 공장도시로 변화하였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1년 내내 숨 가쁘게 무엇인가를 만들고 유통했습니다.



공장도시와 예술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던 곳은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이 찾아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예술은 도제식으로 이어지는 손기술 중심에서 세상 만물을 이용해 철학을 담는 창으로 폭을 넓혔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을지로 일대의 상품과 제작가능한 환경은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미디어아트를 열어나간 '백남준'도 키네틱아트의 거장 '조나단브롭스키'도 을지로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장치들과 소공인들의 손재주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이곳의 자원은 산업을 넘어 문화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국가의 경재가 성장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시대에 발맞춰 을지로도 자신의 역량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 테크니션 이정성,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 ⓒ이정성 (좌)   /  다다익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989(우)▲


이외에도 을지로에게 수혜를 입은 예술가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선배들이 손으로 그린 을지로의 제조공장 지도는 꼬깃꼬깃 후배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지도는 디지털 매체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그렇게 예술학우들 사이에서 지도는 유효했습니다. 여전히 을지로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접근하기 어렵고, 낯선 곳이었지만 을지로를 통해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고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습니다.


2016년부터 필자가 스마트폰 메모장에 담고 다닌 을지로 산업지도 ⓒ디노마드




학생작품

공장지대를 걷다 보면 간판에 '학생작품'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학생'과 '작품'은 언뜻 딱 어울리는 말 같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 다소 미숙하지만, 전문성을 갖춘 예술가로 성장하고 있는 '학생'의 구상도 '작품'으로 생각하고,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여겨주는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공장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이 발주하는 것들은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때론 귀찮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을지로의 사장님들은 함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같이 머리를 맞대고 어려움을 고민해 주십니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는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능력자들에게 연결해주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을지로는 예술이 기대어 성장할 기회를 열어주는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른 을지

'을지'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이지만, 살수대첩 이후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강건함과 독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을지로'라는 지역명은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성을 회복하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었고,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된 구축함 이름을 '을지문덕함'이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국방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이루어지는 훈련은 '을지연습'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을지로'를 통해 '을지'는 우리를 지키는 방식에 새로운 면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문화창발 하는 지역, 다양성을 담보로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00여 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꿈을 위해 머무는 곳(2019년 기준), 그들이 만든 공간은 도시의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따라 찾아들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예술은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유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내고, 상대의 의견을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귀가 자유 민주주의 근간이라면 '을지로'라는 작은 도시는 인근 다른 도시들과 연동되며 우리가 더 나은 민주주의지향할 수 있도록 토양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경신정밀 손글씨 간판, 입정동, 2016 ⓒ고대웅



마무리하며

도심에 위치한 을지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지해 줬습니다. 눈먼 자들도 터를 잡고 살 수 있게 해 줬고,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삶의 질을 높이는 기틀이 되어 주었고, 전란 후 작은 공간이라도 머물 곳을 만들어 주었고, 먹고살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국민이 주인 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과업들을 하나씩 넘어갔던 을지로는 오늘날 도시 속 예술이 머물 수 있는 장소로 변화했습니다. 높아지는 빌딩 숲 사이에서 도시인의 삶은 획일화되어 가는 듯했으나, 도시의 균열 사이에 자리 잡은 예술을 통해 각자의 색이 바래지 않을 수 있는 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열려 있는 틈이 더 넓어져 길이 될지, 아니면 이내 사라질지는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적지 않음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을지'에서 만들어진 예술은 다양성이 가능한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순기능을 목격할 수 있는 어느 변곡점에 와있습니다.



첨부자료

폐허가 된 을지로 인근, 2022 윌리엄 코크런 기증 자료, 6·25 전쟁 참전 미군 기증 사진, 광복~1950년대, 1952-5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50, 1960년대 청계천변의 판자촌, 『도심 속 상공인 마을; 도심 상공인들의 생활문화』, 2010, 15쪽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위대한 '1,003대 TV탑' 상상···제 손에서 현실이 됐죠", 2019, 서울경제

메모장, 스크린캡처, 2016, 고대웅

경신정밀 간판, iPad mini2, 2016, 고대웅


참고자료

중구문화예술기능 기반조성을 위한 기초조사 결과분석, 2019


추가자료

 작업의 기술, 중심잡지

 세운맵, 세운협업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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