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는 왜 을지로가 되었는가
들어가며
'을지로'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을지로'라고 불리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보려 합니다. 도심은 많은 것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에 공통 분모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나가면 보다 이후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나눌 수 있을것 입니다. 그럼 '길'의 탄생과 변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1부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도심의 동맥과 모세혈관
서울시청에서 DDP를 잇는 거대한 대로를 걷다 보면 반짝이는 새것의 고층 빌딩숲을 지나 낡은 도시를 만나게 됩니다. 낡은 도시 안엔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실핏줄 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건물과 건물을 관통해서 길이 나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가건축사무소의 조정구대표님은 특이한 골목길을 '속골목'이라 이름 짓기도 하셨습니다.
미로 같이 연결된 골목과 그 안에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선뜻 들어서기 어렵습니다. 익숙치 않은 골목의 풍경과 분주한 공장들에서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느껴집니다. 2017년 부터 그 어려움이 오히려 매력이 되었지만.
도시를 하나의 신체로, 길을 그 안을 연결해주는 혈관으로 비유한다면 '을지로'는 동맥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뻗어있는 '골목'들은 모세혈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혈관을 따라 산소가 운반되듯 길을 따라 도시 구석구석에 생기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길은 어떻게 오늘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걸까요?
길의 탄생
4개의 산으로 둘러쌓였던 얕트막한 분지가 도읍으로 점지되고 얼마 후 지형에 맞춰 새로운 수도가 탄생합니다.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4대문을, 중앙엔 보신각을 세웠습니다.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이 정비되어 도성 백성들의 생활을 위한 물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청계천 북쪽엔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궁궐이 들어섰습니다.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14세기 당시 동아시아에 최첨단 학문이었던 '성리학'을 근간으로 그동안 쌓인 인문학, 과학지식을 총 동원하여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도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1394년(태조3년) 10월 한양은 이상국가실현을 위한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음양에 근거해서 일지, 북극성 때문일지, 청계천 북쪽으로는 국가기관들이 들어섰고, 임진왜란이후 경운궁(현 덕수궁)이 생기기 전까지 임금의 중심 활동 권역은 북쪽이었습니다, 남쪽은 백성들의 생활을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였을지 고산자 김정호선생님이 그리신 수선전도를 보면 종로 이남 청계천 인근 부터 한성 내부의 지명이 모두 거꾸로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 천북에서 남을 마주하고, 천남에서 북을 마주하듯 말입니다. 이를 청계천이 당시 한양사람들에게 어떤 기준이 되어 주었던 곳임을 짐작해보게 됩니다.
산 기슭에 자리 잡았기에 현대 도시에서는 기획되기 힘든 자연지형에 맞춘 곡선의 길들이 탄생습니다. 단, 국가기관과 기관을 잇고, 시전이 위치한 길은 직선에 가깝게 기획되었고 상대적으로 넓었습니다. 대표적인 길이 경복궁 앞으로 뻗어나온 육조거리와 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로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국가의례기 치뤄지기도 하였고, 많은 물자들이 운송되기도 하였습니다.
천북 종로가 돈의문과 흥인지문을 연결하며 국가의 중요한 길이었다면, 천남엔 소의문과 광희문을 연결하는 동현(銅峴)이 있었습니다.
구리빛의 삶과 죽음
동현(銅峴)은 구리개길의 한자식 표기였습니다. 구리개길이라 불린 연유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길이 구리빛을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는 소의문, 동으로는 광희문으로 연결되었던 길은 중심엔 왕립의료기관이었던, 허준선생님과 같은 왕실 소속 의원들이 백성을 치료했던, 혜민서가 있었습니다. 혜민서를 중심으로 길엔 약재상들이 늘어서 있었니다. 한양에 살았던 백성들은 구리개길을 따라 의원을 찾아가고 약재를 구매해 병을 치료하기도 하였으며, 명을 다하면 시신은 소의문과 광희문으로 실려나가 장사를 치루었습니다. 이런 삶의 흔적은 오늘날도 남아 있습니다. 광희문 앞 신당(新堂)이라는 지명도 당시 죽어 성 밖으로 실려나온 이들의 혼을 위로하고 사후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빌어주었던 신당(神堂)이 많았던 것에서 유례하였습니다. 이처럼 청계천 이남 가장 큰 길이었던 구리개 길은 삶과 죽음이 연결되는 길이었습니다.
천변의 삶
개천(현 청계천)은 한양이 수도가 되면서 태종때 정비된 하천이었습니다. 어느 문명들이 그렇듯 치수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도읍의 생명줄인 청계천이 마르는 것도 문제였지만, 홍수는 생활터전 전부를 땅위에서 지워벼렸기에 우기에 크게 범람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위를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것은 국가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한양을 둘러싼 산을 지나며 흘러온 빗물을 따라 퇴적물도 청계천 바닥에 쌓였기에 관리를 소흘이 하면 천의 수용가능한 물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흥인지문(동대문) 옆 성벽의 물길인 오간수문에 나무와 같은 이물질이라도 걸리는 경우엔 천은 흐르지 못하고 범람하기 일수 였습니다.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는 각 민족과 국가에 따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지만, 유교와 한자문화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권에선 한족의 역사가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한족 상고사에 등장했던 삼황오제는 근대 이전까지 동북아시아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가르침을 받아 문명을 만들어 갈 수 있었는지, 당시 하늘의 마음을 닮아 성공한 왕들은 어떠하였는지를 전해주는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그중에서 도 요임금과 순임금이 가장 으뜸되는 성군으로 천자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랬던 그들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법람하는 황하 치수에 실패했으며, 치수에 성공한 신하였던 우가 그 공을 인정 받아 순임금을 다음으로 선양받은 것은 대대로 동북아시아에서 치수가 성공적인 임금의 자질임을 상징하는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역시 당시 유교와 한자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웃한 한족의 상고시대의 세계관을 공유 했던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치수와 왕의 정당성이라는 연관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조정은 치수에 많은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0km에 달하는 천을 정비한다는 것은 백성들을 대규모로 노역에 동원해야 했기에 전체를 관리하는 것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광교이상의 상류 관리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장마철이면 어김 없이 청계천은 범람하였고, 이대 한양의 생활오수역시 함께 범람하여 생활공간에 침범하였습니다. 이는 전염병이 돌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때문에 개천인근의 저지대는 신분이 높은 부하고 귀한 자들이 거주지로 삼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산 기슭에 자리 잡을 수 없었던 이들은 자연히 천 주변에 모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효경교
현 청계로4가 인근엔 효경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수선전도에서도 찾아볼수있는 다리는 유교경전인 효孝經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이 일대 역시 범람을 많이 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맹인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에 맹인들도 각자가 수입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하려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삶은 어려웠습니다. 그 지역 일대에 맹인들의 자녀들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눈이 먼 아비와 어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살피며 함께 살아갔다고 합니다. 이에 국가는 그들의 삶을 치하하며 효경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까운 곳에 효경교라는 이름의 돌다리를 청계천에 설치하여 생활의 편이를 더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효경동과 효경교 이외에도 한양 백성 중 계급이 낮거나 빈민 계층은 개천 인근에 살았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국가는 그들에게 얼음을 나눠주기도 하고, 미꾸라지 전매권을 주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살피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차별을 겪으며, 때가되면 닥치는 재해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생활이 지속되었지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청계천의 사람들은 살아오며 도시로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들이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만들었던 장이 발전하여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상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그렇게 오늘날 「을지로」의 원형이 되어준 「구리개길」은 1914년 신작로가 탄생하기 전까지 청계천 남쪽의 요한 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길목을 따라 물자고 오가고, 삶과 죽음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대로를 중심으로 남산기슬으로 뻗은 작은 골목들은 오늘까지 서울 도심의 원형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날 청계천의 원형이 되어준 개천은 치수의 어려움으로 1936년 부터 1976년까지 40년의 시간 동안 서서히 지하화 되었다. 산에서 흘러온 작은 물줄기들이 거대한 한강이 되는 물길은 모두가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첨부자료
인왕산, canon400D, 2022, 고대웅
을지로, googlemap, 2022
수선전도, 김정호, 종로/청계천/구래개길 일원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도성도, 보물 제1358호, 1856-1872年, 서울역사박물관
경성 수표교 근처의 청계천벼늘 지나는 사람들, 조선풍속풍경사진첩, 조선풍속연구, 1920, 서울역사박물관
가교보월, 광교, 임득명, 1786, 삼성출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