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일 금요일 C 작가 올림.
두 번째 편지
친애하는 J소장님께.
J소장님, 안녕하세요.
C 작가입니다.
벌써 3월이 되었습니다. 3월을 여는 첫째 날은 왠지 모를 뭉클함과 벅참이 있는 날입니다. 을지로 서쪽에 위치한 삼일대로와 거리에 늘어선 태극기가 100여 년 전 거리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왠지 오늘 을지로 곳곳에 숨겨진 예술가들의 공간은 고요하게 느껴집니다.
지난날 소장님의 답신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일상에 있는 곳이지만 비일상을 경험하게 하는 곳, 문화의 유통뿐 아니라 창발이 일어나는 곳이라 언급해 주신 대목에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훌륭한 학생들도 현장에 함께 해준다니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함께 기록하고 서로의 시선을 교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선 모든 골목, 모든 건물, 모든 층수에 발자국을 남기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우리가 하기에 너무 큰 일인 것을 알기에 현실을 직시해 봅니다.
총 8개의 공간을 추려보았습니다. 모든 공간이 각자의 위치에서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제가 본 지난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네트워크에 그물코가 되어주었던 공간들 위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각양각색의 공간들이며, 취향도 지향도 모두 다른 곳들입니다. 그중, 첫 장소로 '작은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을 갓 깨고 나온 새끼 오리는 처음 보는 생명이 무엇이건 어미로 생각하고 따른다고 하지요. '작은물'은 제게도 그런 곳 입니다. 힙지로라는 이름이 붙기 전 을지로에 첫 발을 내디딘 많은 이들에게도 그런 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상막한 도시에서 잠시 긴장을 모두 풀고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마치 오아시스에 위치한 여관 같은 곳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남,
저는 2015년에 처음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세운상가 4층에 위치한 'Space ba 421'이라는 대안공간이었습니다. 기획자, 예술가들이 함께 작당모의하는 작은 사무실이었습니다. 그곳이 처음으로 외부 작가에게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게 저였습니다. 저 스스로 예술이 정말 쓸모 일일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 전시였습니다. 때문에 아주 작은 전시였지만 16년 예술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후회 없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던 전시였습니다.
어느 날 전시장을 지키고 있던 중 쇼윈도 밖으로 '한 고운 사람'이 가가호호 사장님들께 인사드리며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봐서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사장님들의 초상화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저 고운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저 사람은 왜 여기서 초상화를 전해드리고 있을까. 초상화를 받은 사장님들은 좋아하실까. 잠깐의 질문은 시야에서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이내 휘발되었습니다.
이후 1년 4개월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저는 상상만 했던 을지로의 작업실을 얻게 되었고, 'OO은대학'이라는 곳에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작업실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저를 인터뷰하러 온 분들 중 대학교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도시재생이 현장에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세운상가 복도에서 잠깐 마주쳤던 '고운 분'이 함께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성이었으며 도시재생 중 커뮤니티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가 사장님들께 전달했던 것은 관계 형성을 위한 마음 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윤상'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OO은대학'은 구성원 모두 닉네임을 사용합니다.
세운 사람들, OO은 대학 연구소, 2016 : ►보러 가기
*당시 OO은대학에서 진행한 인터뷰 자료를 첨부합니다. 48명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은물,
2017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을지로를 지나다 다시 후배들을 마주쳤습니다. '윤상'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친구 5명과 함께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물'이라는 이름을 지은 그곳은 20대 예술가들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했나 봅니다. 공간을 다녀온 친구들은 그곳이 너무 좋다며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화를 더듬어보면 '와인'을 그곳에서 마셨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와인은 저에게도 을지로에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먼가 멋진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고 멋진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2017년, 조경을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와 조경 프로젝트를 진행했었습니다. 조경 영역에서는 미술을 끌어왔다고 생각하겠죠?ㅎㅎ 그때 알게 된 몇몇 소장님들이 을지로에 있는 세미나에 참여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이 '작은물'이었습니다. '왜 조경업에 임하는 분들이 작은물에서?', '대관을 했나?'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알고 보니 '작은물'의 멤버 들 중 다수가 조경을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씨앗 폭탄을 만들어 홍대에 테러하듯 곳곳에 뿌리고 다녔고, 삼삼오오 모여서 음악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도시에 맞지 않는 사람들 같다. 그래서 이들이 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 폭탄이 그 골목에서 쓰레기 취급받고 버려졌을지, 몇이 싹이 텄을지, 녹화가 얼마나 되었을지 정량적인 결과는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행위가 도시에 필요해!'라는 문장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3층과 4층,
작은물은 3층과 4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을지로의 대부분의 건물이 그랬었듯 '작은물'이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공실로 방치되었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불이 꺼진 좁고 긴 계단을 올라보면 창고나 공장으로 사용하기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계단 끝에 있는 흐릿한 창에 드는 빛을 마주하고 오르다 보면 지면에서 다른 세계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윤상'을 비롯한 친구들이 쓰임을 다 한 것 같았던 공간을 찾아왔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대가로 두 층을 임대하는 것이 용이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모여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을지로 한복판에서 같이 모여 앉아 밥을 지어먹는다니.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상당히 낭만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쌓이는 낭만 때문이었을까요.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예술가 친구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다 합니다. 점점 공간의 목적이 더 명확해져야 했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작업실로 사용할지, 카페를 할지, 바를 할지, 전시공간을 만들지, 공연 공간을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른 기능은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작은물'은 카페와 공연을 중심으로 장소로 서서히 자리 잡아갔습니다.
작은물이 파생시킨 공간
요호서울 : @yoho_seoul_official
진달래 : @jinndarle
*작은물의 시작을 함께한 친구들은 인근에 각자의 지향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3층은 '작은물'의 본진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공간을 만드는 '윤상'과 '윤숭'의 특유의 따뜻함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그들이 사람을 대하고 나누는 온기로 채워진 공간입니다.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곳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편안함을 줍니다. '작은물'에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그 온기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거칠게 살아남은 옛 벽과 바닥. 어디서 왔는지 다 알 수 없는 가구 위로 친구가 찍어준 사진, 친구가 만든 도자, 친구가 그린 그림, 친구가 달아준 인조식물 등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아기자기한 그 모습이 서로 누가 주인인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하나가 있지 않지만, 모두가 있어 명확해 짐을 느낍니다. 물건들은 그저 공간의 빈자리를 서로 채워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 있어." "너는 거기 있어."라며 작품들이, 오브제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이요.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들 까지도 "이 친구 음악도 들어봐." "나 들었어면 저 친구것도 들어봐."라며 얘기 하는 것 같습니다. 통일되지 않은 색들의 펼쳐짐. 하지만 중심을 잡아주는 주인장. 서로의 영역을 교차하며 편안합니다.
4층은 이에 반해 차갑습니다. 이곳에도 분명 지난 사람들의 흔적이 쌓여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서로 경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분위기는 아래층과는 사뭇 다릅니다. 마치 '작은물'의 내면이 있다면 진동 폭이 낮은 방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비어 있고, 다소 공허합니다. 그리고 여백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잠깐의 흡연을 하기도 하고, 짧은 담소를 나눈 후 곧 3층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리고 주인장들은 손님들 앞에서 하기 어려운 식사를 하는 등 잠시 몸을 숨길 휴게실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층위를 가진 따뜻한 빽빽함과 차가운 여백이 서로를 보완하며 존재합니다. 대외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서로 보완되듯이. 이런 역할이 두 층의 기능을 나눈 것 같습니다. 층의 경계면은 '작은물'이 카페와 바를 통해 지속적인 영리를 취하면서 공연과 전시가 가능한 공간이 되었고, 운영자가 잠깐의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안과 밖을 오가듯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어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계속 그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말과 노래,
아르코에서 운영하는 '인문360'이 을지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적이 있었습니다. 2018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때 마이크를 잡은 '윤상'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윤상'과 '윤숭'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듣고 행복했습니다. 그들 덕분에 저는 '회복'했었습니다.
'윤상'은 특유의 수줍은 얼굴과 목소리로 "꼭꼭 씹어먹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반복적으로요. 후에 '윤숭'은 저 말을 얼마나 많이 할지 궁금했다며 미소 짓기도 했습니다.ㅎㅎ 그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이 있고, 서로 이해하지 못할 면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 모여 앉아서 밥을 꼭꼭 씹어 먹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누구라고 미운 마음이 없겠으며, 누구라고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 들었던 '윤상'의 관점이 제가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후 3부에 이어진 두 분의 노래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뭔가였습니다. 사실, 그전까지 그들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관객석 뒤쪽에서 세운홀에 울리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이런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로하고 회해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그들의 노래 같은 예술을 하고 싶어 졌습니다.
을지로 옛 골목에서 미래의 꿈을 꾸는 사람들, 작은물 공연, 2018 : ►보러 가기
- 여름날의 나를, 4'14", 작은물
- 태평가, 6'28", 작은물
- 아리랑, 2'58", 작은물
어느 날부터 '윤상'은 더 노래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선택이 공감되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더 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노래를 합니다. 더 노래를 잘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기술적으로 숙련이 되는 잘함도 있겠지만, 여기서 잘한다 함은 더 잘하는 환경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윤상'의 위치와 존재를 그려봅니다. 그가 그 위치에 있어 줌으로 사람들은 안정을 느끼고, 지치면 찾아와 교류합니다. 결국 그는 노래를 하지 않지만 노래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어떠한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작은물'에 쌓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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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골목으로 흘러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을지로 길목을 채웠던 그들의 노래를 공유드립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처음 '작은물' 혹은 '윤상', '윤숭'에 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윤상에게 했던 두 가지 질문으로 이 편지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왜 이름을 '작은물'로 지었는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큰 물에서만 놀려고 하는데 누군가는 작은 물에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는 작은 물도 그에게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을지로에 밀려오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애석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기도 한데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밀려나더라도 다시 땅에 닿는 순간 새로운 시작이 될 거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현명합니다. 유연하게, 따뜻하게, 포근하게 그 위치에 '작은물'이 있습니다. 공감하고, 공생하고, 함께 성장하는 곳입니다. 서로의 꼴을 애정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공간을 소장님을 비롯한 건축가들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또 어떤 눈으로 공간과 사람을 발견해 주실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발견한 이야기가 또 어떻게 다른 곳에 녹아들지 궁금합니다.
두서없는 편지를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바다도 작은 샘에서 부터 시작되는구나.
오는 3월 28일 어떤 의미에서 연원이 되어준 '작은물'에서 뵙길 희망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총총.
2024년 3월 1일 금요일
C 작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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