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진단명을 꼭 받아내야만 할까
지인 중 한 분의 아이가 9살인데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다.
아이는 언어적 유창성이 딱히 떨어지는 편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상호작용도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원활한 편이다.
자기만의 관심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관심사가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포켓몬 카드다. 그래서 그런 행동이 자폐스펙트럼이나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의 흔한 특징 중 하나인 한 가지 영역에 과하게 집착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만이 느끼는 촉을 따르자면 어휘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편이고, 산만한 면도 있고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도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언어치료 수업도 몇 년째 받고 있고, 사회성 수업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아빠와 할머니 같은 사람은 아이의 문제가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고 아이의 성격 탓이지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엄마가 너무 유별나고 예민하게 아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멀쩡한 아이를 아픈 애 취급"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고 들었다.
아이 엄마는 이런 가족들의 주장에도 굴하지 않고, 서울의 대학 병원과 지방에도 소아정신과로 이름난 병원들에 순례라도 칭해도 좋을 만큼 각종 검사를 받고, 제대로 된 진단을 받으러 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자폐면 자폐다, ADHD면 ADHD다. 정확하게 검사 결과가 나오면 좋은데, 어떤 종류의 검사를 해도 공통적으로 일치되게 나오지 않고, 결과가 딱 떨어지지도 않고 애매한 표현으로 아이의 상태에 대한 설명만 나올 때가 많아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상세불명의 언어 발달 지연이라거나, ADHD 진단을 내릴 순 없지만 ADHD 성향을 가지고 있다거나, 진단차원의 질환은 아니고 정서, 행동상의 문제라거나.
진단명은 불분명한데, 내려진 처방은 운동을 많이 시키고 독서를 해주라는 등 일반적인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나도 어려움이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 보니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소아정신과 질환에 대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준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런 내가 그 아이의 모습을 봐도 사실 크게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이 없다. 그냥 좀 더 예민하고, 감정 조절을 약간 어려워하고, 남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걸 꺼려하는 성향인 것 같아서 아이 고유의 기질과 특성에 따른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약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분이라서 그런지 여러 병원을 거침없이 예약하고 검사를 받고 진단을 받으러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는 게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쉬운 일 같지만, 내가 겪어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이름난 소아정신과 병원들은 대학병원들은 막론하고 개인병원들도 진료 예약을 잡는 것만 해도 몇 달, 몇 년을 대기하는 것이 기본이다. 지방 광역시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은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가서 일단 검사를 받아야 하는 절차를 거치고, 검사를 받은 후에 결과를 들으러 또 가야 한다. 한 번 갈 때 아이 데리고 가면 당일치기가 힘들 수 있으니 숙소를 잡고 1박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진료날짜를 내 일정에 맞출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 직장에 다니는 엄마라면 진료일에 맞춰서 월차도 내야 한다.
아이가 받아야 하는 검사들은 종류도 정말 다양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데 이렇게 먼 거리에서 출발해서 병원에 간 아이가 컨디션이 평소만큼 좋을 리가 없다. 많은 경우 아이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금세 바닥나서 검사를 다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는 대학병원 같은 경우에는 한 군데에서만 받아봤고, 우려했던 것보다는 그래도 덜 최악의 결과가 나와서 그 결과를 맹신하기로 결심했고 그 후로 다른 대학병원을 가보지 않았다. 유명 대학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봤고, 그리고 집 근처의 병원에 다니며 약 처방과 짧은 상담을 받고 있다.
그 엄마를 보면서 나는 너무 노력이 부족한 엄마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일로 바쁜데도 늘 유명한 병원에 예약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정확한 진단명과 검사결과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여러 병원을 다녀보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일 그 자체보다 검사 결과를 듣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도 있다. 혹시 이 병원에서는 내가 각오했던 범위 내에서의 결과나 나왔는데, 이 분야에서 권위 있고 유명하다는 다른 병원에서는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종류의 결과가 나올까 봐, 아니면 이미 있는 증상에서 이것저것 다른 질환들이 추가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아이의 상태와 어려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최대한 제대로 된 진단명을 받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병원을 다녀도 딱히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진단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그만큼 아이가 어떤 어려움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의학적인 진단을 내리기에는 애매한 범위에 있어서 부모가 좀 더 각별히 신경을 쓰면 정상 범위로 언제든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아이라는 뜻이 아닐까.
매번 새로운 병원에 다니면서 아이가 수행하기에 몇 시간씩 걸리는 검사를 받고 또 몇 주후에 그 결과를 들으러 가기 위해 가야 하는 그 시간들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고통스럽고 스트레스가 가중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또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한데, 단지 의사가 내려주는 그 정확한 의학적 진단명을 받기 위해 그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소진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신과적 질환에 따라서 치료 방법이 부분적으로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결국 받을 수 있는 발달센터 치료의 종류는 겹치는 경우가 많고 부모가 어려움이 있는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결국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해 주면서, 운동을 시키고 책을 많이 읽어주는 것과 같은 일반 육아서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법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수교사 교육을 말하다>에서 부모가 겪은 자녀의 장애진단과정을 폭력적인 시간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장애진단과정이 폭력적인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료적 관점으로만 아이의 다름을 바라보게 하고 판단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다름에 대해 온갖 결함, 결핍, 기능 장애에 관한 내용들로 빼곡한 설문지에 끊임없이 체크해야 하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의사로부터 온전히 암울한 예측만을 들어야 합니다.
의료적 관점은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장애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인한 기능적 제약에만 초점을 둡니다.
<신경다양성 교실, 김명희 >
나는 장애진단과정이 부모에게 폭력적인 시간이라고 한 표현에 굉장히 크게 공감이 갔다.
당연히 검사를 받고 정확한 의학적 진단을 받는 일은 중요한 일이고, 부모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통 아이의 부족함과 결핍을 확인하고 마주해야만 하는 검사 질문지들을 끝없이 체크하다 보면 온통 부정적인 말들뿐이라 속이 상한다. 왜 이렇게 내 아이는 또래들이 수행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능들을 제대로 하는 게 거의 없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발달이 뒤쳐져버렸는지, 애가 앞으로 제대로 사람 구실은 하면서 살 수 있게 될지, 평생 독립도 하지 못하고 내가 죽을 때까지 끼고 살면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게 될는지 암울하고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미래만 끊임없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이를 처음으로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생지옥이었다.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제대로 아이를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나왔고 메이는 목을 참아내는 방법만 찾아 헤맸다. 생리 기간도 아닌데 핏덩어리가 터져 나오면서 하혈을 했다.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을 때와,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네 아이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이러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야. 앞으로 애의 미래는 의사인 나도 장담할 수 없어."라는 말로 아이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의학적 진단을 받을 때는 천지차이다.
신체적인 질환이 아닌 정신과적 질환의 경우에 이런 기분에서 더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아이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듣는 일은 부모에게 충격이고 공포 그 자체다.
나는 이런 폭력적인 시간을 견뎌낼 용기가 부족해서인지 더 이상 다른 유명한 병원에 찾아다니지 못했다. 두 가지 병원에 다녀본 걸로 만족하고 이 진단에 맞춰서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주변 센터엄마들이 서울의 대학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왔다고 하면 궁금해서 아주 꼬치꼬치 캐묻는다. 과정은 어떠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신뢰가 갈만한지 어떤 치료법을 추천해 주었는지 의사의 말투는 친절했는지 등등을 자세히 물어본다. 나는 못해본 진료를 받고 온 엄마에게 한 줌의 존경심의 마음을 품으면서.
애매한 경계의 위치에 서 있는 아이들은 진단도 그만큼 애매하게 나오기 때문에 더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평상시에도 어쩔 때는 아주 평범한 정상아이처럼 보이다가도, 어쩔 때는 얘를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끝없이 희망과 절망의 끈을 오가게 만든다.
무엇이 되었든 다 자식을 위해 하는 일이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나도 잘 모르겠고 알 길이 없다.
이 병원, 저 병원 순례하러 다닐 에너지도 의욕도 용기도 부족해서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도 힘들고 상처만 될 갖가지 검사를 굳이 여러 번에 걸쳐 받을 필요가 있겠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치료하기 위해서, 더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진단명을 받기 위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노력하는 엄마들에게 존경과 경외심의 마음을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