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들과 밤에 만나 맥주를 마실 자격이 있는 엄마인가
대학 때는 술자리를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나갈 정도로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고 노는 걸 좋아했다.
내 몸이 생각보다 술에 약하고, 뒷날 숙취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술과 별로 맞지 않는 체질이라는 사실을 몸소 다년간의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누가 부르는 자리라면 빠짐없이 나갔고, 연애할 때도 데이트 코스로 술을 자주 마셨던 것 같다.
MBTI검사를 하면 늘 내향성이 나오는 나인데, 술을 마시면 외향적인 인간이 되는 그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를 꽤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행동한 적이 많았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그런 술자리와는 영영 멀어졌고, 어차피 체력도 따라주지 않기에 그다지 아쉬움은 없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동네에서 친해진 엄마들이 오전에 커피 한잔 하게 만나자고 하면 그 모임에는 그래도 빠지지 않고 나가곤 했다. 아이 등교시키고 나면 나는 항상 내가 세워둔 그날의 계획과 루틴이 있었지만, 갑자스럽게라도 누가 불러주면 과감히 할 일을 포기하고 스타벅스에 가서 두세 시간은 거뜬히 수다를 떨었다.
휴직하고 집에 있으니 아이 말고 어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걸 인식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가끔 올라왔다. 일시적 전업주부인 나를 그래도 그들의 모임에 불러준 것만 해도 처음에는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엄마들과 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 같은 게 있음을 느꼈다. 발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나는 마음속 깊이까지 공감할 수 있는 대화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엄마들도 나름의 삶의 애환과 고민들이 있기도 했고, 분위기 띄우는 엄마의 재미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들로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속 한편은 씁쓸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한가하게 대화를 나눠도 될 자격이 있나?"를 생각하곤 했다.
지금 발달장애에 관한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아이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시간에 정상적인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만나서 나도 마치 보통의 아이를 키우는 "보통 엄마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끊임없이 엄마로서 내가 이런 과분한 시간을 누려도 될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다.
내가 먼저 모임을 주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불러주면 조금 늦게 가더라도 성실히 나가긴 했다.
그분들은 평소 술을 즐겨마시는 편은 아닌데, 어쩐 일로 아이들은 집에 맡겨두고 저녁에 한 번 동네 맥주집에서 만나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아서 밤모임까지 하지 않는 이 분들의 스타일이 나와 잘 맞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제안이었다.
순간 나는 솔깃했고 한참을 고민했다. 늘 퇴근이 늦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뒤늦게라도 합류해서 나도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져볼까. 사람들과 밤에 술집에서 맥주를 마셔본 게 언제인지. 그래봤자 술집이 즐비한 시내도 아니고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는 역전할맥 같은 호프집에서 만나는 거겠지만 그것조차 나에게는 얼마나 큰 사치인가. 새벽까지 2차, 3 차가면서 놀 사람들도 아니고 맥주 한 잔 시켜놓고 두세 시간 정도 놀다가 12시 이전에 마무리될 것 같아서 크게 부담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서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다음번에는 꼭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나는 아직 밤에 엄마들과 만나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 엄마들과 달리 내 아이는 adhd로 약을 복용하고, 사회성이 부족해서 친구 관계에 어려움이 있고, 감정 조절 문제로 일상에 힘든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낮에 커피 모임도 아니고 저녁 밤 모임까지는 나갈 처지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나도 물론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가끔씩 집에서 남편과 맥주 한 잔씩은 마신다. 그러나 가족들은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도 알고 아이에 대한 나의 고민과 속마음을 여과 없이 풀어놓을 수 있어서 술을 마셔도 나 자신을 조금 잠금해제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의 진단명에 대해 오픈하지도 않았고, 대충 사회성이 좀 부족한 정도로만 알고 있는 동네 엄마들과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 푼답시고 이야기를 나눈 들, 내 마음만 더 공허해질 것 같았다. 나는 절대 그들과 같은 부류의 엄마가 될 수 없다는 현실만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우리 동네는 학군지도 아니기에 교육 정보나 학원 이야기가 주가 되는 분위기도 아니다. 괜히 엄마들 모임에 한두 번 빠지다 보면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최근의 동네 소식과 소소한 주변 이야기들을 놓칠 것 같은 왠지 모를 그 사소한 뒤처진다는 느낌이 싫어서 오전 커피 모임에는 놓치지 않고 꼭 참석하곤 했다. 그러나 저녁 맥주 모임은 느낌이 크게 다르게 다가왔다. 좀 더 나를 내려놓고 평소보다 더 편한 분위기에서 속얘기도 나누게 될 것 같은데, 나의 이 마음속 깊은 곳 고민과 우울감을, 평범한 엄마들을 굳이 알 필요 없는 민낯의 그것들을 혹시 나도 모르게 내보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남편도 퇴근하고 나서 그 모임 이야기를 듣더니 애는 자기가 볼 테니 나가서 기분전환하고 오라고 말해주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 번쯤 빠진다고 해서 나를 아예 소외시킬 사람들도 아니고, 다음번에 또 기회가 있겠지 싶었다.
만나지 못했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아직 나는 내 앞에 헤쳐나가야 할 과제들이 많고, 그 시간에 아이와 눈 한번 더 마주치며 한 번 더 안아주는 게 나에게는 더 값지고 소중하다. 저녁에 엄마들과 마시는 맥주 한 잔으로 인해 기분전환도 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혹시나 더 우울해질까 봐,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고 더 비관하게 될까 봐 피했는데 잘한 선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