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요상한 꿈을 꾼 날
요즘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평소에도 꿈을 잘 꾸는 편인데 요새는 더 심해진 것 같다.
아이의 겨울방학이 두 달째로 접어들고 길어지다 보니 나도 체력적으로 많이 지치고 힘든 지 3년째 꾸준히 실천해 왔던 나만의 모닝루틴도 다 틀어지고 매일 늦잠을 자는 중이다. 처음에는 알람을 못 듣거나 끄고 다시 자버리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자책도 많이 했는데, 이게 며칠째 늦잠을 자다 보니 이제 죄의식도 없다.
그래, 모닝루틴 따위 내 몸과 체력이 받쳐줘야 하는 거지. 일단 아이 방학 끝나면 다시 재정비해보자,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니 이제는 잠에 취해서 남편 출근길 마중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근할 때는 어떻게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다이어리 쓰고, 책 읽고, 스트레칭까지 하고 아이 챙기는 일까지 다 했었는지 그때의 나 자신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뒤바꿔서 생각해 보면 초등 아이의 방학을 함께하는 일이 그만큼 피곤하고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서 일하는 것보다, 아이랑 하루 종일 부대끼면서 삼시세끼 밥 해먹이고 학원 한 두 개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나머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같이 운동을 나가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일이 생각보다 굉장히 피곤하다. 차라리 출근해서 일을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엄습한다.
아이랑 하루종일 부대낄 일이 없는 우리의 남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창 자라나는 에너지 넘치는 초등 어린이를 하루종일 뒤치다꺼리 해보지 않았다면 엄살 부리는 소리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길.
아무튼 요새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고 지쳐서 잠으로 메꾸는 중인데 매일 이상한 꿈을 꿔서 아침마다 일어나면 "이게 꿈이야 생시야"할 때가 많다.
얼른 정신 차리고 아이 아침밥을 차리면서 현실로 다시 복귀하곤 한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평소보다 더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꿨다.
꿈의 배경은 어렸을 적 놀던 시골 할머니집 동네 한가운데였는데 엄청나게 키 크고 훤칠하게 잘 생긴 남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파란색 럭셔리 스포츠카를 그 시골에 갖고 와서 선물로 들이댔다. 나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차를 타보고 고마워했는데 그러다가 시골 잔치집에 가서 화려한 상차림의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밥을 먹는 등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상황들이 계속 펼쳐졌다.
나는 아주 짧으면서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미니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무슨 축제 무대가 있는 곳이었다. 사람 북적한 곳에 화려한 옷을 입고 서서 무대를 향해 구경을 하고 있는데 내 옆에 나보다 한참 더 키가 큰 남자가 슬쩍 와서 서있었다. 내 연인인지, 남자친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잡았고 이윽고 뽀뽀까지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런 민망한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꿈속에서는 그게 당연한 현실이었고 나는 아주 대담하게 행동했어서 지금 생각해도 참 웃기는 부분이다.
그 왕자같이 잘생긴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정확한 사실이고, 내 기억에 남주혁을 많이 닮아 있었다. 참 이상한 게 평소에 남주혁을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연예인 남주혁이 본다면 참 어이없겠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연예인은 아니다. 너무 어리기도 하고 큰 키에 비쩍 마르고 조막만 한 얼굴을 한, 하이틴 영화 주인공 같은 남자는 별로 끌리지 않는다.
어렸을 때야 좋아하는 연예인도 참 많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잘생기거나 멋진 배우를 봐도 그다지 설레지도 않고 마음이 동하지도 않는 편인데, 굳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면 떡 벌어진 어깨에 마초 같은 스타일의 좀 더 남성스러운 매력을 가진 사람이 멋져 보인다.
이런 나에게 왜 하필 남주혁 같은 남자가 꿈에 나와서 나를 설레게 했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할 때까지는 꿈 생각이 안 났는데 갑자기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 얼굴을 보니 꿈이 불현듯 생각난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입꼬리가 자꾸 위로 올라가면서 실실 웃게 된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풋풋한 연애의 설렘의 감정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아가씨 때야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름 과감한 스타일도 많이 시도했고 웬만하면 하이힐을 즐겨 신고 다녔는데 이제는 그런 스타일과 멀어진 지 오래다. 특히나 아이 케어하면서 집에만 있는 요즘은 더 심해져서 운동복이나 최대한 편한 원마일웨어와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그런 내가 민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타이트한 미니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연예인처럼 잘생긴 남자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킨십을 하다니.
괜히 실실 웃음이 나와서 웃다가 남편이 미친 사람 취급할까 봐 선수를 쳐서 실토했다.
"나 좀 이상한 꿈을 꿨어."
"무슨 꿈? 내가 어디 가서 바람이라도 폈어?"
"아니, 그 반대야.. 내가...."
남주혁 비슷한 남자랑 연애질 하는 꿈이었다고 말하자 남편의 얼굴에 썩소가 번진다. 그래서 좋았냐고 묻는다.
"꿈에서 남주혁 같은 남자랑 있다가 아침부터 나 보니까 오징어 만난 기분이야?"
빵 터진 나에게 꿈에서라도 행복했으면 됐다고 자조적인 말투로 말한다.
뭐, 실제 상황도 아니고 꿈에서 그랬으니 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괜히 찔리는 기분은 뭘까.
꿈에서 내가 평소에 원하고 바라던 욕망을 해소한 걸까.
내 머릿속은 온통 아이를 향한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차버린 지 오래라 이런 설렘 터지는 연애 감정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봐도 전혀 공감되지 않는 영역이었는데, 참 신기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이십 대 때나 느껴봤던 설렘의 감정을 느껴서 찰나의 순간이지만 행복했다.
부끄럽지만 고백해 본다.
남주혁 님, 제 꿈에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한줄기 빛이 되었네요. 덕분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아이 케어하면서 살아낼 힘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