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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15. 2023

전재준은 왜 매력적인가

저도 봤어요! 더글로리

더글로리 시즌1이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에도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한 번 꽂히면 정신 못 차리고 푹 빠져서 한동안 그 생각에 사로잡혀버리는 성향 때문에 일부러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게다가 작년에는 넷플릭스 중독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스스로 고심 끝에 넷플릭스 구독권을 해지했다. 이건 정말 큰 결정이었다. 영어 공부라는 핑계로 미드나 리얼리티쇼를 한 달에 만원 가량의 돈으로 무제한 볼 수 있었던 혜택을 끊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넷플릭스가 아니어도 유튜브에도 볼만한 영상들로 가득했지만 내 노력의 일환으로 스크린타임을 그나마 조금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글로리를 안 보는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나면 모두가 한 번쯤은 더글로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주제가 학폭이라는 것 말고 아무런 내용을 모르는 나는 그 사이에서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더글로리는 넷플릭스 콘텐츠라 보려면 다시 재구독 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했다. 가까스로 큰 결심 끝에 끊어낸 넷플릭스인데 드라마 한 번 또 보자고 다시 시작하기는 싫었다. 더글로리 내용을 다 알고 있던 남편에게 물어보니 유튜브 요약영상 찾아보면 다 이해 간다고 하기에 나도 그냥 요약영상으로 보기로 했다. 


중간중간에 놓치는 장면들이 많아서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요약 영상만 봐도 대충 전체적인 내용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어서 본 콘텐츠도 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다. 과연 인기 많은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도 흥미진진했지만, 주인공 문동은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각기 자신만의 강한 개성과 연기력으로 각자만의 캐릭터를 탄탄하게 구축해서 뽐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온 캐릭터는 전재준이었다. 전재준은 문동은을 괴롭힌 가해자 중 한 명이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폭력에 가담한 것 같지는 않지만 주로 성추행을 일삼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또 다른 피해자 윤소희는 성폭행까지 한 인물이다. 막강한 부를 가진 부모님 덕에 학창 시절부터 안하무인에 망나니처럼 살아도 물려받을 재산이 많아서 팔자 편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금수저 중에 금수저다. 약자를 괴롭혀놓고도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며, 결혼한 유부녀 친구와 비밀공간까지 마련해서 서슴없이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재준은 권선징악의 미덕을 살린 이 드라마에서 악이다. 


전재준은 과연 악을 상징하는 캐릭터일까.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에는 전재준의 연기 장면만을 모아 놓은 "짤"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욕을 워낙 찰지게 하는 등 배우의 연기력을 극찬하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사람들은 전재준이라는 캐릭터를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문동은의 인생을 밑바닥까지 밟아버린 학폭 가해자들 중 한 명인 전재준이 왜 밉게 느껴지지 않는 건지 나조차도 의문이 들었다. 배우이기에 잘 생기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그는 확실히 악에 가까운 인물이다. 


전재준은 악을 서있는 인물이지만 그만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색약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이로 인해 엄청난 열등감을 느낀다.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치료하기 힘든 선천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적인 면이 조금 부각된다. 비록 나쁜 캐릭터지만 이런 약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곱만큼의 애잔함이 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한 가지 전재준의 행동 중에 이해가지 않았던 건 왜 굳이 하예솔을 친딸이라고 친권을 뺏어오려고 애를 쓰는가이다.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고 미혼이었던 건 여자들과 진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지 않고 결혼이라는 의무와 구속에 얽매이기 싫어서 그저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게 낙인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결혼도 해보지 않은 총각 전재준이 자신의 핏줄인 하예솔을 생물학적 아빠라는 이유로 박연진의 결혼 관계를 깨뜨려서라도 자기가 데리고 오려고 하는 행동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박연진을 사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자기 핏줄인 자식을 되찾고 싶어서 그런 건지, 전재준이 예솔이에게 집착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복수의 소용돌이에 크게 휘말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예솔이를 되찾고 오고 싶은 그 욕망 때문에 그것에 휘둘리다가 약점이 되어,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몇 가지 장면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생물학적 친딸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간접적인 성추행을 당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짜고짜 그 선생님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다. 사실 법적인 아빠 신분도 아니고, 누가 봐도 참 오지라퍼다 싶은 장면인데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김은숙 작가가 정말 대단한 게, 더글로리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초반에는 선과 악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것 같지만 뒤로 갈수록 선과 악이 혼재되는 입체적인 캐릭터들로 그려진다. 명오도, 혜정이도, 사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선택이지만 가해자들끼리 갈등과 균열이 생기면서 서로 공격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문동은의 복수에 협조를 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악에 선 가해자들이 결국 문동은을 돕는 선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착한 사람이 복수하는 그것보다 더 가열찬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선하기만 할 것 같은 주인공 곁을 지키는 남자 여정도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그래서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예전의 드라마들에서는 착한 사람은 그저 바보같이 착하기만 하고, 나쁜 사람은 반성 없이 매번 미운 짓만 골라해서 시청자들의 미움과 비난을 한 몸에 받기 일쑤였다. 물론 박연진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 중심에 서있긴 했지만. 


사람은 원래 착한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직장에서는 갑질하고 막말하면서 상처 주는 나쁜 상사여도 집에 서 자기 자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나쁘기만 하거나, 늘 한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인간의 이런 본성을 잘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가 만들어내고 배우들이 완성해 낸 캐릭터 하나하나가 빛을 발해서 이 극의 완성도를 더 높여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드라마 폐인 되고 싶지 않은데, 넷플릭스에 재가입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재미난 드라마들이 속속들이 생겨나면 나도 모르게 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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