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싸기 시작했는데요
한 두 달여 전부터 인가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싸게 되었다. 처음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는데, 아무튼 매일같이 염분 덩어리의 고지방, 고칼로리 메뉴가 대부분인 바깥 음식을 먹는 남편이 결국 건강검진에서도 복부비만 주의요망을 받게 된 게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30초 중반 젊을 때까지야 뭐든 잘 먹어도 딱히 살이 눈에 띄게 붙지도 않았고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최근에 부쩍 체력적으로도 힘들어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건강상에도 문제가 오겠다 싶었다.
남편의 식습관 자체가 별로 건강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기도 해서, 점심에 늘 바깥 음식을 먹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제와서는 내 발등을 찍고 싶은 마음도 조금 들긴 하지만, 그땐 조금이나마 건강한 음식을 점심으로 먹여보고자 하는 의지가 급발동했다.
10년 차 주부라고 해도 일할 때는 거의 반찬을 사다 먹기 바빴고, 아이 입맛 위주의 간단한 요리만 할 줄 알지 성인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한 요리 따위는 시도도 해본 적도 없고 할 의지도 없다. 그런 내가 손수 남편의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으니, 매일 아침마다 해내야 할 집안일 리스트 중에 커다란 짐이 하나 추가된 셈이다. 매번 반찬을 사다 먹을 수도 없고, 아무리 냉동식품으로 몇 가지 때운다고 해도 한 두 가지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하는 메뉴도 있다.
초반에는 약간 의욕적이었다. 유튜브에 찾아보니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남편의 도시락을 싸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그분들은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도 아니고 아침마다 새로운 메뉴들을 직접 만들어서 하나하나 싸고 있었다.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식품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밥에 반찬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종류에,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특식도 돌아가면서 싸는 모습에 나는 의문의 한 패를 당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어떤 영상에는 정말 정성스럽게 맛깔난 메뉴로 도시락을 싸는 내용이었는데, "저 정도면 남편이 월 몇 천 이상 벌어다 주는 게 틀림없어."라는 댓글이 달린 걸 보았다. 남편을 챙겨주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저 돈만 벌어다 주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그 댓글이 불편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여부와 상관없이 그 도시락을 싸는 주부는 적게 벌어다줘도 열심히 쌌을 것 같은데.
도시락 싸는 영상들을 보면서 처음엔 약간 따라 하며 흉내 내보기도 했지만 곧장 내 영역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고, 나는 그냥 내 식대로 하기로 했다. 오뚜기 3분 짜장이나 고추참치 같은 캔 참치를 메인 반찬으로 하고, 친정엄마다가 갖다 주신 김치와 밑반찬은 서브반찬으로 하거나 전날 먹다 남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싸주기도 했다. 확실히 장 볼 때에도 평소보다 더 고민거리가 늘어나서 도시락 메뉴까지 고려해야 하니 집안일이 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래저래 나는 힘들기도 하고 수고로워졌지만, 남편은 진심으로 좀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얼 싸주든 간에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먹어주었고, 지인에게 은근 자랑하기도 했다. 그전에는 항상 오늘 점심은 뭘로 먹을까 고민하는 게 일이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졌고, 더군다나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 집밥다운 밥을 점심으로 먹으니 건강해진 느낌이라고 했다. 당장 체력이 좋아졌다거나, 늘어난 복부 살이 확 줄어든 건 아니지만, 그 나이에는 더 망가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일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든다. 그중 한 가지는 "나도 누군가 내 점심밥을 이렇게 챙겨주면 좋을 텐데."이다. 남편이야 내가 이렇게 챙겨주지만 내 점심은 내가 알아서 대충 챙겨 먹으니 가끔 서글퍼지곤 한다.
그리고 더 암담한 것은 한 번 시작하고 습관이 돼버리니 이제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싸주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만둬버리면 후폭풍이 클 것 같고, 남편도 다시 바깥음식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
아, 나는 이제 매일 아침 남편 도시락만 싸다가 이번 생은 마감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나의 온몸을 휘감아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질 때도 있다.
그래도 뭐, 아직은 할만하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바깥일에 매진하는 남편을 위해서, 가끔 미울 때도 있고, 한 술 더 떠서 꼴 보기 싫어 못 견딜 것 같은 순간들도 더러 있지만 아직은 고마움이 더 큰 우리 집 가장이니 내가 할 수 있을 때 잘 챙겨줘야겠다.
아, 내일 도시락 메뉴는 또 뭘로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