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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Sep 12. 2023

쓰레기 분리수거 좀 할 줄 아는 9살

날마다 성장하는 ADHD 아이

아이를 정말 궁디팡팡하며 칭찬해주고 싶은 일이 있었다. 늦잠 자버린 토요일 아침이었다. 전날 친척 장례식에 다녀와서 늦게 잠이 들었고 평상시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오전에 부모교육 세미나가 있었고 아이는 지인의 집에 맡기기로 했다. 얼른 밥 먹이고 씻기고 약 먹이고, 나도 챙기고 바쁘디 바빴다.


옷도 입고 겨우 다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눈에 밟힌다. 오분 정도 여유가 있는데 이걸 해버리고 나갈까. 근데 쓰레기 분리수거도 해야 하는데.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차서 이걸 버리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약속된 시간에 늦을 것 같다.


일단 설거지를 하려고 앞치마를 동여맸다. 그리고 큰 마음먹고 아이에게 부탁했다.


"이거 음식물 쓰레기, 카드 리더기에 대고 뚜껑 열리고 버리고 나서 음식물쓰레기 전용 봉투에 남은 비닐은 버릴 수 있지? 할 수 있겠어?"


카드도 대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옆에 흘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고 버려야 하고 남은 비닐 처리도 해야 한다. 9세 아들에게 쉽지 않은 과업인 것 같다. 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찝찝했다. 조금 늦더라도 그냥 내가 하고 나갈까, 아니면 아이를 한 번 믿어볼까.


분리수거 버리러 갈 때 자주 아이와 동행했기에 옆에서 한 두 개씩 버리는 건 도와주기도 하고 자주 지켜본 적은 있다. 하지만 혼자 쓰레기를 들고나가서 분리수거 처리를 시켜본 적은 없다. 다른 9살들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내 아이는 이 정도의 심부름은 아직 시켜본 적이 없었다.


혹시 실수하면 내가 뒤늦게라도 나가서 뒤처리 하지 뭐, 하는 마음에 아이의 손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지와 음식물 처리용 카드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자기 할 수 있다고, 한 번 해보겠다고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한 번 시켜보는 거야.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호흡을 가쁘게 쉬며 집으로 뛰어 들어온다. 아, 힘들어. 하면서.


"봉지가 혹시 음식물 쓰레기 통에 같이 떠밀려 들어가진 않았어? 뒤처리까지 잘했지?"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잘했다고 짧게 대답하고 내 할 일을 이어갔다.


설거지를 급히 마치고 다 챙기고 나가려는데, 현관문 앞에 놓아둔 쓰레기가 안 보인다. 현관문에 늘 재활용 분리수거 쓰레기를 모아둔다. 그것도 안 보이고, 나중에 버리려고 놔둔 관급봉투에 모아서 묶어둔 쓰레기도 안 보인다. 이게 어쩐 일이지?


"OO아, 여기 쓰레기들 다 어디 갔어? 설마 네가 다 갖다 버린 거야? 음식물 쓰레기랑 같이?"


아이는 자기가 잘못이라도 한 거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음식물 쓰레기만 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아이는 음식물 봉지도 들고, 현관문 앞에 있던 다른 쓰레기들도 양손에 다 들고나가서 버리고 온 것이다. 양이 꽤 많았기 때문에 그걸 어린아이 혼자 다 들기에는 손도 모자라고 무겁기도 했을 텐데 얘가 어떻게 처리한 건지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그냥 다 버려야 할 거 같아서 들고나갔어. 플라스틱, 비닐, 종이류로 나눠서 버렸고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통에 다 버렸는데."


별 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설명하는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너무 놀라고 순간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아이를 진심으로 안아주면서 칭찬했다. 그 어떤 순간보다 그 순간의 아이가 사랑스럽고 예뻤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마음이 나온 거니 너란 아이..


하라는 숙제를 하고, 공부를 하고, 단원평가를 백점 받아왔을 때보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아이가 이제 이런 일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발달이 느려서 항상 걱정이 많다. 또래보다 언어도 느리고, 사회성도 부족하고, 친구관계도 서툴러서 자존감도 낮은 우리 아이. 수많은 육아서에서는 아이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시간 아이의 매니저가 되고 손과 발이 되어주려 노력하던 내 모습을 반성하면서 조금씩 혼자 하는 영역을 늘려보려고 했지만, 외동이기도 하고 내가 하면 뭐든지 빨리 처리할 수 있으니 그냥 해버린 적도 많다.


그래도 언젠가 아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국영수 공부시키면서 학습 능력을 끌어올리는 일보다는 혼자 은행일도 보고,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간단한 음식도 하고, 자기 빨래도 할 줄 아는 일처럼 사회독립적 능력을 길러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결국엔 사람은 혼자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오게 마련이고 부모는 필연적으로 늙는다. 그러려면 아이를 끊임없이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시키지도 않은 분리수거 쓰레기까지 낑낑대며 들고나가서 버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오고 자랑스럽다. 예전 시대에는 부모들이 다들 바빴기에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던 때다. 그래서 그 시기의 사람들이 더 독립적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힘을 은연중에 길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의 육아 방식이 백 퍼센트 옳은 것도 아니고 아니다 싶은 부분도 많지만, 적어도 그런 부분은 요즘의 육아 트렌드보다는 더 나았다고 본다.


아이가 더하기 빼기 연산 연습을 하고, 구구단을 유창하게 외우는 것보다 쓰레기 분리수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간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했던 순간 중에 하나로 이번 일이 크게 자리매김할 것 같다. 더 자주, 더 많이 시켜봐야겠다. 아이가 혼자 해볼 수 있는 일은. 조금씩, 차근차근, 그렇게 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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