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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07. 2023

오래 안 보아야 예쁘다

제 자식 얘기입니다만

저번 주 이틀 연속 아이의 하굣길은 멘붕이었다. 할머니 연배로 보이시는 몇 분 빼고는 이제 2학년 아이 하굣길을 데리러 교문 앞에 나오는 엄마는 거의 없다. 몇 명 보이는 분은 백발백중 1학년 엄마들이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러 집과 아주 가까운 교문까지 나선다.


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같이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친구와 함께 기분 좋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아이의 모습이 가벼워 보였다. 멀리서 자세히 보니, 가방을 메지 않은 상태였다. 가방 어디다 놔두고 왔니, 이 녀석아.. 요새 계속 외투를 잊어버리고 다녀서 속을 썩이더니 그날은 외투는 잘 챙겨 입은 대신 가방을 놔두고 온 것이었다. 순간 화가 났지만 일단 참았다. 또 항상 그랬듯이 엄마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면서 실랑이 벌일게 분명하니 내가 한 번 참고 스무스하게 이 상황을 넘어가자고 그 순간 다짐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가방 안 매고 왔네,라고 부드럽게 말한 뒤 엄마가 가서 찾아와 주겠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부터 짜증 내고 화를 내면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먼저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냥 좋게 가방 가져다주겠다고 했는데도 못마땅한지 주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아기 아이가 떼쓰듯 생꼬락서니를 부렸다. 보다 못한 옆에 있던 친구가 "제가 가져다 줄게요"하면서 교실까지 가서 아이의 가방을 가져다주었다. 그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워서 계속 칭찬해주고 있는 내가 보기 싫었는지 자기는 아무 잘못 없다고 징징댔다.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참고 참았던 인내심의 끈을 놔버렸고 아이에게 할 말, 못 할 말 잔뜩 퍼부었다. 내가 느낀 감정, 화난 이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다 짚어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이미 감정 조절이 안되고 있는 상태에 있었던 아이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계속 울고불고하면서 매달렸다. 이럴 거면 제발 너 혼자 알아서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라고 엄마도 너무 힘들다고 한탄하면서 울어버렸다. 서로 울고 짜증 내고 화내고 분노하는, 그야말로 나쁜 감정들이 화산폭발에서 용암처럼 흘러나오듯 터져버린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남편과의 통화로 어찌어찌 상황이 일단락되고 서로 아름답지 않은 화해를 하면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하루종일 찝찝했다. 오전 내내 아이가 학교가 있고 떨어져 있을 때는 하교하면 아이에게 더 잘해줘야지 하는 여유로운 마음이었는데 학교 끝나고 만나자마자 이 사달이 나버리다니. 내가 좀 더 참을걸 그랬나. 아무리 연습하고 다짐해도 잘 안 되는 게 아이에게 화가 날 때 끓어오르는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는 일이다. 언제쯤 나는 그게 가능해질까. 죽는 날까지 내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다가 저 세상 가려나.


다음 날도 아이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자 그 전날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불안감이 올라왔다. 오늘은 또 무슨 이벤트가 있으려나 하는 조바심에 심장이 떨렸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철저히 빗나갔다. 하굣길에 아이는 눈이 퉁퉁 부어서 울음에 지친 얼굴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꾸 자기에게 시비 걸고 괴롭혀서 선생님께 남아서 혼났다고 했다.


아이는 철저히 다른 친구들의 잘못만 있을 뿐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내내 억울하다고 했다. 친구들 다 학교폭력에 신고하고 싶다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세상 서러운 사람처럼 울어댔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다지 큰일이 아닐 것 같기도 했지만, 애가 또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닐 수도 있어서 선생님께 연락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정말 이런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과민반응하는 학부모가 되지 않고 싶었는데, 진짜 자식 일에 대범하게 대처하는 쿨한 학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실패라는 걸 인정하면서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하게 되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큰 일은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빙고게임을 하다가 옆에 친구들과 아웅다웅 말다툼이 있었고 내 아이도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맞받아쳐서 공격적인 말도 던졌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수업 끝나고 남겨서 화해를 시키고 마무리했는데도 아이는 하굣길 내내 억울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울면서 집에 오게 된 것이다. 학교 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너무나 과민반응하고 있었다. 달래는데만 한참이 걸렸다.


아.. 정말 내 자식이지만 오래 안 보아야 예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평화와 여유가 넘쳐나는 나의 작은 옹달샘 같은 감정이 아이와 만나기만 하면 폭풍 쓰나미로 바뀌어버린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이의 감정에 휩쓸려 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자식 걱정은 정말 관에 들어가야만 끝나는 것일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나는 애초에 엄마가 되지 말았어야 할 재질의 인간은 아니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이번에 조카가 기숙사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너도 나중에 기숙사 학교 가는 거 어때? 기숙사 들어가면 2층 침대에서 잘 수도 있고 친구랑 같이 매일 잘 수 있어." 아이는 그런 학교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관심을 보였다. 아이를 기숙사에 들여보내고 주말에만 만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봄바람 불듯 마음이 설레어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나쁜 엄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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