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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15. 2023

절대음감은 저주받은 재능인가요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기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닌 지 3주 남짓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자기는 악보를 못 보는데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고 걱정하면서 피아노 학원 자체를 거부했다. 친한 여자친구가 학원에 등록했대, 너도 한 번만 해보자 겨우 달래서 등록하게 됐다. 상담 때 만난 원장선생님은 밝고 활기찬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였고, 아담한 규모의 학원은 깔끔했고 같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듯했다.


아이들은 학원에 들어오면 정해진 루틴대로 자연스럽게 이론 공부 책을 책장에서 집어 들고 넓은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부를 하거나 1인 피아노 방에 들어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바이엘 치는 아이들부터, 체르니에 이르기까지 뚱땅뚱땅 들리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 어릴 적 피아노 학원 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강제 소환된다. 잔디피아노학원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아직 잘 계실까.


한꺼번에 여러 아이들이 올 때는 두 명의 선생님이 바쁘게 오가며 지도하느라 조금 정신없어 보였지만 어쨌든 피아노학원의 분위기는 뭔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에너지 넘쳐 예뻐 보였고, 아이도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주 3회만 다니겠다고 주장하던 아이도 학원을 보더니 5회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학원에 다닌 지 일주일. 집에서도 피아노를 꼭 쳐보고 싶다고 해서 급하게 디지털피아노도 구입하고, 학원 교재와 같은 바이엘 교재도 사줬다. 한자, 메뉴판, 시간표 등등 꽂히는 건 무조건 스케치북에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들은 이제 학원 이론 시간에 배우는 음표, 쉼표에 꽂혀서 집에 오면 한참 스케치북에 음자리표와 음표들을 그려댔다.


아이는 자기가 인상 깊게 본 것들을 똑같이 재현해 내서 그려내지 않으면 못 견딘다. 그것은 똑똑해서라기보다는 머릿속에 들어온 시각적 정보를 어떻게는 분출해내고 말아야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것 같다. 자기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의식이랄까.


과몰입이든, 집착이 든 간에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하려는 자세는 일단 기특했다.

그런데 엊그제 학교에서 가져온 즐거운 1학년 책에 나온 초등학교 교가를 같이 불러보는데 거의 음치 수준인 나에게 대뜸 "엄마, 첫 음이 솔음인데 왜 솔 음으로 안 불러?" 하는 거다.

"엄마 솔음으로 부른 거 맞는데."


얘가 솔음의 음정을 어떻게 안다고 하는 소리지, 싶었다. 나는 아이에게 피아노 앞에 와서 돌아서서 눈감아보라고 했다. 오른손 음계 하나씩 쳐보고 무슨 음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다 맞춘다. 왼손 낮은 음계, 샵까지도.

다 알고 있다.

소름이 돋는다.

우리 애가 절대음감이라니.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에겐 강점이자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 애도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건가? 아니면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겪는 청각적 주의력 부족 증상 중 하나란 말인가.


ADHD, 자폐, 서번트 증후군 이 따위 질환들의 흔한 증상 중 하나가 절대음감인 걸까?


느린 맘카페에 올려보니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린다. 음악 전공인 분들도 있었는데, 전공을 한다면 도움이 되는 재능이고 음악은 스킬만이 아닌 다른 예술적 요소들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냥 플러스가 되는 요인 중 하나로 보면 된다, 그래도 어쨌든 재능인 건 맞으니 많이 응원해 주라고 했다.


그리고 악기를 장기적으로 중학교 때까지는 배우도록 잘 도와주라고. 두 명 정도는 자기 아이도 발달상에 어려움이 있는데 절대음감이라고, 이 아이들 특징인 것 같다고 했다.


피아노 전공한 언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어머 절대음감이야? 하면서 반가워했고 나의 걱정과 싸한 기분을 말하니 일단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피아노 학원 다니게 지지해 주면서 지켜보자고 한다.


예체능 분야 전공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 분야도 그 안에서 치열하고, 살아남기도 어렵다고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만약 아이가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열정이 있어 계속하고 싶다고 하면 말릴 필요가 있을까.

부모는 재능이 없어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응원해 줘야 맞겠지.


하긴 나도 어릴 때 피아노를 꽤 잘 쳤다. 손가락 힘이 좋다고 칭찬받곤 했고, 초등학교 때 합주부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 여러 번 올라가고 중학교 때는 플루트를 배웠다. 하지만 전공은 언감생심이었다. 부모님도 그냥 취미이자 특기로 삼으라고 시킨 거였고, 음악 전공은 돈이 많이 드는 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아셨는지 혹시 내가 전공하겠다는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전공할 만큼 뛰어나지도 않았고.


이제 아이한테 음을 쳐보라고 하고 내가 돌아서서 음을 맞춰보았다. 10개 중 한 두 개 맞췄다. 그래, 나는 음악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야. 지독한 음치에다가.


ADHD의 특징이라고 하든, 타고난 재능이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이가 가진 또 다른 힘, 아니면 강점이라고 생각하자. 보통 발달의 아이였다면 대박, 우리 아이 절대음감이야 하면서 환호성 질렀을 것 같은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런 생각은 떨쳐버리기.

음악을 공부한다고 해도 좋고, 남자를 취미로라도 악기를 할 줄 안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니까

무조건 응원하고 지지해 줄 것.


그리고 축복받았다고 생각하자.

부모는 그럴 의무와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위 글은 작년에 아이가 절대음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남겨둔 기록이다. 블로그에 글을 자주 남기던 시절이었다. 소통하는 이웃도 별로 없었고, 그냥 혼자 신변잡기식으로 잡다한 글들을 올리곤 했다. 그런데 위 글에 댓글이 하나 달렸다는 알림이 떴다. 어떤 댓글일까? 내심 기대하며 확인해 보았다.


그 댓글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한 글이었다. 자신의 아이도 자폐스펙트럼에다가 절대음감인데.. 그거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절대 축복은 아니라고 했다. 비속어까지 섞어가며 강한 어투로 착각하지 말라고 단단히 조언해 주었다. 저주받은, 불행한 재능이라고 덧붙이면서.


그 댓글을 보고 기분이 너무나 참담했다. 그래.. 마저.. 우리 아이는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지, 그런 주제에 이런 걸 무슨 재능이라고 축복이니 뭐니 김칫국을 마신건지 나도 참 정신 못 차렸구나.. 하는 생각에 몹시도 우울했다.


만약 애가 아무 문제 없이 정상발달이라면, 절대음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말 그대로 기뻤을 것 같다. 꼭 음악 전공이 아니더라도 음악이라는 영역을 인생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로 만들면서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 행여나 전공을 하게 된다면 음감에 예민하다는 건 엄청난 베네핏이 될 수 있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궁금했다. 내 아이는 청각적 주의력이 낮아서 사람들 말을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그로 인해 언어장애까지 겪고 있는 마당인데, 하필 음감 쪽은 왜 예민하단 말인가.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려서부터 갑작스러운 큰 소음에 예민한 아이였다. 옆에서 개가 짖거나 오토바이만 지나가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이런 흔한 일상의 큰 소리에는 이렇게도 예민한데 왜 주변 사람들의 말에는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검색해 보니 자폐스펙트럼이나 여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절대음감 비율이 꽤 높은 것 같았다. 아이와 같은 센터 다니는 친구도 절대음감이었다. 빅뱅이론의 주인공 셸든(천재적인 물리학자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캐릭터)도 절대음감이다.


나와 남편은 절대음감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피아노도 좀 배웠고, 플루트도 좀 배워서 학교오케스트라 경력도 있긴 하지만 나는 악보 보는 법도 어려웠고, 전공할 만큼 재능이 특출 나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의 끈기와 연습으로 어느 정도 수준만 해낸 정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아이는 누굴 닮아 음감에 이다지도 예민하단 말인가.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엄마, 방금 바장조에서 사장조로 바뀌었어. 이제 단조야.”라고 말하는 이 녀석을 보고 있자면  정말 외계에서 온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가 절대음감이라서 좋은 점은?

1. 피아노 학원을 2년째 보내고 있는데 올해 작은 대회에 나가서 준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대회에 출전한다는 건 음감과는 전혀 관계없다.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인내심을 갖고 연습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상은 탈 수 있다. 아이는 피아노 학원 가서 피아노 치는 것보다 이론 공부를 더 좋아한다.


2. 얼마 전에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음감이 좋아서 잘 따라온다고 칭찬해 주신다. 악기 선택을 잘한 것 같다며 입바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흥미도 높고 악보 이해력이 빠르다고 해주신다. 그렇지만 막상 매일 해야 하는 연습 과제는 굉장히 하기 싫어하고 게으름을 부린다. 이해력이 좋으면 뭐 하냐고.. 끈기가 절대 부족한 ADHD적 특성 때문에 연습은 무지 싫어하니 매일 억지로 시키다 보니 내가 지친다. 누가 보면 때려잡는 줄 아는데, 하루 연습 시간은 고작 10분 내외인데 그것도 하기 싫어서 발버둥을 친다.


3.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악보가 없어도 피아노로 대충 칠 수 있다. 복잡한 곡이 아닌 간단한 동요나 가요는 혼자 한 두 번 연습해 보면서 연주를 하기도 한다. 바이올린 줄 조절하러 갔다가 우연히 칼림바라는 아프리카 전통 악기라는 오르골 소리 나는 악기를 사게 되었다. 아이는 마법에 걸린 듯 그 악기의 매력에 빠져서 이것저것 연주해 보더니 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칼림바도 유튜브에서는 이미 실력자들이 유명한 곡들을 연주한 영상들이 많이 올려져 있었다. 그래도 자기가 직접 연주한 곡들을 짧게나마 올려주었더니 조회수 10, 20 나오는 거 보고 너무나도 행복해한다. 사실 이 조회수도 양가 친척들한테 전화 돌려서 한 번씩 봐달라고 강제 부탁한 거.. 그래도 뭐 이런 작은 경험이 아이의 자존감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기도 하고.


이러고 보면 내 생각에 아이의 절대음감이 굳이 저주받은 재능이다라고 볼 정도로 불행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아이에게 플러스가 되었지, 이로 인해 손해 보거나 괴로운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댓글을 쓰신 분의 입장은, 절대음감은 바라지도 않으니 애초에 소통이나 잘 되고, 발달에 어려움이 없는 게 훨씬 더 낫다는 논지였을 것이다. 나도 그 마음은 이해가 되긴 하나, 아이의 현실은 이미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작은 능력이라고 뭔가 의미 있고 소중한 달란트로 보고 조금이라도 발전시켜 줄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주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의 이런 시각이 망상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긍정주의자적 관점인가?


다시금 검색해 보니 중증 자폐스펙트럼을 앓으면서도 절대음감에 음악적 소질이 있어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각종 장애인 음악대회에서 상을 휩쓴 학생들의 기사가 나왔다. 그와 비슷한 사례는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다들 부모님들이 아이의 강점을 살려주고 싶어서 그것에 집중하도록 지지해 주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소통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출중한 음악적 실력이라면 또 그 분야에서 쓰임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더 길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까짓 저주받은 재능 따위,라고 한탄하기보다 미약하지만 이 작은 강점을 살려서 아이의 자존감을 메꿔주는 수단으로 여기는 게 훨씬 낫다. 혹시 아는가, 우리의 아이도 작은 지역일보 기사에 실린 훌륭한 사례처럼 음악적 재능으로 이어져 자기만의 분야에서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지. 부모로서 지나친 희망도 금물이지만, 바닥의 끝을 알 수 없는 비관론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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