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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22. 2023

초2아들의 인스턴트식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초등 저학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많은 남자아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친구는 키 크고 훈훈한 외모에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성격도 여느 장꾸미 넘치는 초딩남아들과는 다르게 젠틀했다. 당연히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엄친아 스타일이었다. 아들 키우는 엄마로서 그 남자아이가 내심 부럽기도 하고 질투의 마음도 살짝 느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고, 내 아이도 외모만큼은 호감형인데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설사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말이 좀 느리고 답답하니 막상 아이의 실상을 알게 되면 관심도 금방 꺼지기 마련이겠지만.


인기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학교 생활을 하는 것 같은 내 아이에게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다.


"엄마, 오늘 김지유가 나한테 고백했어.."

"뭐.. 뭐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가 드디어 여자친구에게 고백을 받다니! 내 아들에게 호감을 가지는 여자친구가 생기다니! 야호! 신난다.


고백을 대체 어떻게 받았냐고,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아들을 다그쳐서 자세히 물어보았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여자친구가 종이에다가 나 너 좋아한다고, 우리 오늘부터 사귈까?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그 글을 보고 "어"라고 한마디 썼고, 여자아이가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라고 쓰며 필담 고백을 했단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아이에게 고백을 한 지유라는 친구는 학기 초에 대판 싸웠던 아이다. 둘이 무슨 가위바위보 게임 같은 걸 하면서 꿀밤 때리기를 했는데 아이가 너무 세게 맞아서 크게 울었고 그 일로 담임선생님께 혼났다고 했다. 아이가 억울한 만큼 지유도 뭔가 나름의 입장이 있었던 것 같고, 자그마한 일로 소란을 피웠다고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그 후로 아이는 지유와는 말도 안 한다고 했다. 여자친구지만 여러 모로 자기보다 한 수위라고 느낀건지, 아예 회피하는 것 같았다.


지유라는 여자친구는 놀이터에서도 한두 번 본 적이 있는데 키도 크고 몸이 굉장히 날렵해서 운동신경도 좋아 보였다. 한마디로 야무지고 똘똘한 여자아이라서 웬만한 남자애들에게도 지지 않을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같은 반 다른 남자친구와도 갈등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남자아이가 울었다고 들었다.


내 아이같이 조금 소심하고 운동 신경도 없는 성향의 남자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 같은 여자친구인데, 고백을 했다고 하니 참 신기했다. 사귀기로 한 다음날 하교 후에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유는 삼 남매라서 그런지 굉장히 독립적이고 자기 일은 알아서 척척해내는 아이였다.


아이들 먹을 간식을 챙겨주는 척하면서 나는 녀석들이 뭘 하고 노는지 아주 자세히 관찰했다. 저 여자아이가 정말 내 아이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한 번 떠보려고 사귀자고 한 건지 굉장히 궁금했다. 지유는 나에게 "이모, 저희 사귀는 거 아시죠?"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어, 그럼 알지. 앞으로 더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라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다음 날에도 둘은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다면서 시간을 정해서 잠깐 놀기도 했다. 나는 놀이터에 보내놓고도 둘이 뭘 하면서 노는지 궁금해서 멀리서 지켜보았다. 내 아이가 뭔가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보여주고, 지유가 웃는 것 같은 장면을 보았다. 참내.. 정말 연애라도 하는 거야?


문득 궁금해졌다. 내 아이가 정말 "남자 여자가 사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나 있는지. 티비라고는 아는 형님 같은 예능밖에 본 적이 없고 어른들의 러브스토리가 나올법한 티비나 드라마는 관심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아이다. 오로지 아이가 관심 있는 미디어라고는 스마트기기로 하는 게임이나 짱구, 마리오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더군다나 언어발달이 늦어서 그에 상응하는 만큼 상황인지 능력도 늦은 편이라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도 낮을 게 뻔하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같은 반에 OO이가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

"응"

"그럼, OO이가 또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야?"

"응"


세상에나. 반에서 아는 여자아이들 이름을 갖다 대고 물었더니 사귀자고 하면 다 예스란다. 다 사귄단다. 자유주의 연애를 추구하는 바람둥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얘는 사귄다는 걸 그냥 친구 사귄다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여자친구랑 사귀면.. 뭘 하는 거야?"

"매일 만나서 같이 노는 거야."


그렇지, 사귀면 매일같이 만나는 건 맞긴 하는데. 뭔가 아리송하다. 애가 진짜 남녀가 사귄다는 개념을 명쾌하게 아는 눈치는 아니다.


하지만 지유의 입장은 좀 달라 보였다. 남자아이들보다 좀 더 성숙하다고 느껴졌다.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에게 "너 나랑 사귀는데 다른 여자랑 바람피울 거야?"라고 물어보기도 했고, 이제 자기랑 사귀니까 핸드폰 사서 매일 카톡 하자고도 했다. 아이는 폰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라도 생겼다는 듯, 지유랑 카톡 하게 폰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휴.. 여태까지 너의 생떼와 고집을 이겨내고 스마트폰을 손에 안 쥐어주려고 그토록 애썼는데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사주겠냐고. 나는 여자친구랑 연락하기 위한 목적으로 핸드폰을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어느 날은 학원이 같은 방향이라서 둘이 만나서 같이 갔는데, 가기 전에 붕어빵집에 들러서 오뎅을 사 먹었다고 했다. 아이에게 따로 용돈을 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현금카드를 주지도 않는다. 어차피 나랑 매일 같이 다니고 따로 친구 만난다고 나갈 정도로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용돈을 줄 필요도 없다. 돈은 지유가 냈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빼빼로 데이날이 주말이었는데 지유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빼빼로 데니까 만나서 같이 놀자고. 아이는 단박에 거절했다. 나 엄마, 아빠랑 어디 갈데 있다고 하면서 끊어버렸다.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땐 적당히 놀다가 "나 이제 게임해야 하니까 너 집에 가"라고 말하는 아들 녀석이다. 지유는 뭔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아이는 철저히 "여자친구보다 게임이 우선"이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노라니 십 센치의 <봄이 좋냐?>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너의 달콤한 남친은 사실 피시방을 더 가고 싶어 하지 겁나 피곤하대..


아. 남자들은 다 이렇구나. 여자친구보다 PC방에서 게임하는 게 더 재밌는 종족이었지. 십수 년 전 내 첫남친 그 X자식도 그랬었지.. 여자친구보다 게임을 더 갈망하는 아홉 살 아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첫 연애의 추억까지 소환된다. 남자들이란 원래 이런 DNA를 타고난 거였는데, 남친이 나만 바라봐주고 매일 내 생각만 해주길 바랐으니 나도 참 어리석었구나 싶다. 애 낳고 아줌마가 되고 나서야 남자라는 종족의 심리를 새삼 깨닫게 되다니 상당히 억울하다.


지유에게 부모님께 남자친구 사귄 거 말했냐고 물어보았다. 엄마가 대학 가면 연애하라고 그래서 일부러 말하지 않고 숨겼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놀고 있는데 지유의 다른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더니 누구랑 있냐는 질문에 "내 남친이랑 같이 있지..낄낄"하고 대답한다. 흡사 중2소녀들의 대화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옆에서 무심하게 앉아 있는 내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거야말로 동상이몽식 연애가 아닌가 싶다.


사귄 지 열흘 정도가 지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을 전해 들었다. 지유에 관한 일이었다.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어린애라서 실수할 수 있지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나는 못내 신경 쓰였다. 아이에게 괜히 친구에 대한 평판을 깎아내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이를 붙잡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너 어차피 핸드폰도 없어서 여자친구랑 연락을 자주 할 수도 없는데, 지유랑 계속 사귀고 싶어?"


아이는 단박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만 사귀고 싶단다. 그럼 내일 학교 가서 지유에게 좋게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하겠단다. 나는 헤어짐을 고할 때 지켜야 할 법한 몇 가지 예의에 관해서 단단히 주의를 준 후에 이 말까지 덧붙였다.


"엄마가 헤어지라고 했단 말은 굳이 하지 말고.. 알았지?"


사귀든 말든 애들끼리 해결할 일인데 내가 오지랖을 부렸나 싶어서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에게 계속 사귈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내 어투에서 그만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뉘앙스가 있었음은 부정하지 않으련다. 하교하고 집에 온 아이에게 물어보니 지유랑 헤어졌단다. 어떻게 말했냐고 물어보니, 고백받았을 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종이에다가 "우리 헤어져"라고 썼고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단다.


여자아이들의 정서발달은 남자아이들에 비해서 워낙 빠르기 때문에 (물론 못지않은 남자친구들도 많이 있을 테지만) 내 아이로서는 더더욱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 자란 성인인 남편도 가끔 철부지 아기처럼 굴 때가 있으니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남자아이, 그것도 인지발달이 느린 아이야말로 더더욱 여자친구들과의 갭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초2아들의 동상이몽 플러스 인스턴트식 열흘간 연애는 이로써 끝이 났다. 이것도 아이에게 하나의 큰 경험이 된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반에 절반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 게 좋은지, 어떤 식으로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는지 아주 조금은 배운 계기가 됐을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둘의 사이는 철저히 절교 상태가 된듯하다. 지유가 내 책상에 일센치라도 넘어오면 가만 두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매사에 티격태격 싸우는 것 같다. 이거야말로 초2판 사랑과 전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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