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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29. 2023

최근 아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4가지

발달 느린 9세 아이 성장기록

아이는 7세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사회적 의사소통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약물치료와 센터치료를 병행하며 가정에서 도움을 주고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직 더디고 서투른 부분이 많지만 최근에 아이가 보여주는 성장에 있어 긍정적인 모습들을 기록해 봅니다.



먹는 것

아이는 편식이 심했어요. 이건 뭐, 보통 아이들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편식 심한 아이들 흔히 볼 수 있다고 하지만, 특별히 발달이 느린 아이 중에는 편식하는 비율이 높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음식의 "식감"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한 편인 데다가, 평상시 자기가 즐겨 먹었던 몇 가지 종류의 음식만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거든요. 처음엔 아이가 워낙 예민하고 가리는 성격이라서 처음 본 음식에 대한 거부가 심하고 맨날 먹던 것만 먹는다 싶었어요. 그런데 주변에 센터 치료를 받는 친구들 보면 제 아이처럼 편식이 심한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러한 특징도 사실 2-3살에는 특별히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한창 유행했던 방문미술 같은 걸 했는데 온갖 재료들로 촉감놀이도 하고 그중에 음식도 있었는데 굉장히 잘 놀았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 당시엔 음식도 크게 거부가 없어서 부족한 요리실력이지만 이것저것 해주면 큰 거부감 없이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생각해 보면, 또래에 비해서 발달이 느린 것이 눈에 들어오고 티가 나던 시기부터 편식 습관도 나타났던 것 같아요. 늘 먹으려던 것만 먹는 이 습관은 발달지연 진단을 받기 전후로 해서 최근까지 나타난 특징인데요. 저도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늘 애가 잘 먹는 음식 위주로 돌려 막기식으로 해주다 보니 더 발전이 더뎠나 싶기도 해요. 끝없는 내 탓은 너무 슬퍼지니까 여기서 그만하기로 하고..


7세까지는 이런 편식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더 심각해졌어요. 초등 고학년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급식 메뉴에 적응을 어려워했고, 하필 식욕 부진이라는 약물 부작용과 시기가 겹쳐서 입학 후 1학년 때 학교 급식은 거의 못 먹고 다 남기다시피 했어요. 오후에 집에 오면 그제야 밥 달라고 해서 부랴부랴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에만 먹으려고 했지요.


주변 또래 아이들을 보니 1학년 정도 되면 햄버거도 먹고, 피자도 먹고, 매운 떡볶이도 먹는 아이들도 더러 있더라고요. 물론 어찌 보면 몸에 좋지 않은 음식들이고, 밖에서 사 먹는 메뉴들이긴 하지만 같이 야구장에 가거나 어울릴 때면 유독 제 아이만 그런 음식들을 전혀 먹질 않으니 좀 그렇더라고요. 다 같이 햄버거를 먹기로 했는데 아이를 위해서 따로 도시락을 싸가서 챙겨주는 것도, 애들은 다 햄버거 먹으면서 즐거워하는데 아이는 "나는 못 먹어"라고 하며 주먹밥을 펴서 먹고 있는 모습도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못 먹는 음식이 어찌나 많은지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매운 김치 종류도 정말 안 먹었습니다. 이건 그나마 학교 급식을 매일 먹으면서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급식 메뉴에 김치볶음밥이 나왔는데, 매워서 안 먹으려다가 한 두 입 맛을 봤는데 생각보다 맵지도 않고 맛도 괜찮았나 봐요. 세상에 집에 와서 김치볶음밥 해달라고 하기에 깜짝 놀랐답니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어요.


최근에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피자가 간식으로 나왔는데 다른 아이들이 먹는 걸 보면서 아이도 한 두 입 베어 먹게 되었고 무려 한 조각을 다 먹었다고 했어요. 식단 관리에 신경 쓰는 편이라 최대한 피하려고 애쓰는 음식들이지만 애도 일반적인 아이들 사이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만은 없더라고요.


이렇듯 식감에 대한 예민함이 조금 줄어든 것 같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긴 해요.  뼈치킨은 살을 발라줘야 하고 순살치킨만 먹어요. 그리고 덩어리가 큰 음식은 꼭 가위로 잘라줘야 하고 혼자 입으로 베어 먹는걸 특히나 힘들어해요. 일본 여행 갔을 때 돈가스를 먹는데 식당에서 손님에게 가위를 주지 않는다기에 어찌나 당황했던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입술 부분 근육의 힘이 부족한 건지 스스로 베어 먹는 힘이 굉장히 부족하고 아직 어려워해서 이 부분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매번 가위로 잘라서 대령하느라고, 가끔은 짜증도 나고 지치지만 자꾸 다그치가 아이가 밥 먹다가 울기도 하고, 자기도 베어 물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그래서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얘가 햄버거 하나를 잡고 혼자서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으니, 다른 부분도 점차 나아지리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예능 시청

예능 시청이 왜 느린 아이의 성장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의아하시죠? 티브이 보는 게 뭐가 좋다고 말이에요..? 일부러 아이의 티브이 시청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말이에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독박육아와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만화 영상을 티브이로 보여주긴 했지만 항상 엄격하게 시간을 제한하고자 노력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더더 엄격하게 안 보여줄걸 하는 후회가 남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최대 1시간 이상 보여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거실에 TV를 설치하지 않고 안방에만 두었지요. 결국 편한 거실 소파 놔두고 안방 침대에 모여 앉아서 보게 되었지만요.


아이는 TV나 영상 시청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종류도 제한적이었어요. 언어발달이 느린 아이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상황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상황인지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어떤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는 보기 싫어하죠. 그래서 책 같은 경우도 수과학 분야에만 꽂혀서 그것만 봤으니까요. 저는 어렸을 때 닮도록 반복해서 읽었던 이솝우화나 흥부놀부와 같은 전래동화를 아이는 끔찍이도 싫어하는 걸 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저는 재미있어서 계속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있거든요.


아이는 말 그대로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보기 싫었던 거였어요. 한글을 읽을 줄 알아도 말 그대로 한글 글자를 낭독할 줄 안다는 것이지 그 문장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스토리는 이해가 통 되지 않았던 거죠. 책도 그렇지만 만화영화도 내용이 길거나 기승전결 구조의 애니메이션은 도통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전에 제가 충격받았던 일이 있어요. 조카가 7살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한 때 꽂혀서 퀸노래를 즐겨 듣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요. 7세 관람가 영화는 아니지만 애 키우는 집은 따로 영화관에 가기 힘드니 엄마, 아빠가 보면서 조카도 자연스럽게 옆에서 같이 보게 되었나 봐요. 근데 7세 아이가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서 퀸의 팬이 되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제 아이랑은 너무 다른 거예요. 내 아이라면 그렇게 서사가 길게 이어지는 호흡이 긴 영화를 볼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올시다예요. 긴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4,5세 여자아이들도 몇 번씩 반복해서 본다는 <겨울왕국>도 재미없어했거든요.


아이는 상황파악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예요. 하물며 <아는 형님> 같은 예능프로그램은 더더욱 이해가 어렵겠지요. 그것은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개그맨들과 연예인들이 나와서 서로 과거에 겪었던 이야기나 재밌는 썰을 풀면서 웃음을 주는 내용인데, 아이는 그들이 하는 농담이나 반어법 등을 이해할 수가 없죠.


어느 날 또래 친구들이 <아는 형님>을 본다고 자기도 보고 싶다고 하길래 틀어준 적이 있어요. 아는 형님의 프로그램 형식의 전반부는 유명연예인들이 나와서 자신에 관한 퀴즈를 내면 패널들이 맞추어가면서 이야기 대화가 이어지고 후반부는 신동이 나와서 매주마다 새롭고 다양한 게임 위주로 진행해요. 아이는 전반부는 지루해하고 재미없어하는데, 신동이 나오기만을 기다려요. <아는 형님>은 시청률도 높고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예능이라 그런지 신동이 진행하는 게임의 종류가 굉장히 단순하기도 하고, 초등학생들도 이해가능한 수준이에요. <무한도전> 이후로 예능을 끊은 지 한참 된 저인데 아이 때문에 토요일 저녁은 항상 같이 <아는 형님>을 시청해요. 프로그램 시간도 길어서 거의 한 시간 반이 훌쩍 넘는데도 그냥 주말에는 마음 놓고 TV 좀 보여준다 생각하고 보는 편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말장난이나 트렌드도 알 수 있고,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강호동이나 서장훈, 이수근은 꽤나 유명해서 알아두면 좋은(?) 연예인인 것 같더라고요. 요새는 유튜브 쇼츠나 릴스같이 짧고 강렬한 영상이 대세라서 어른들도 호흡이 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힘들어진 세상이래요. 그러니 아이들이 진득하게 앉아서 언제 빵 터질지 모르는 웃긴 순간들을 기다리며 TV를 보는 것조차 이제는 집중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제 개인적인 의견은 아이패드나 스마트폰 손에 쥐어주는 것보다 같이 나란히 앉아서 함께 웃을 수 있는 예능 시청을 하는 게 훨씬 더 건전한 가족 여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자조

"자조"라는 단어는 느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익히 들어본 용어일 텐데요. 아이가 숟가락을 쥐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등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기 몸을 챙기고 돌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해요. 당연히 발달이 느린 아이는 이런 부분이 약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발달 치료를 시작할 때에도 아이의 이런 자조 능력을 길러주는 걸 중요시해요.


솔직히 수학 곱셈 좀 못하고, 어려운 한자 용어 좀 모르고, 말이 약간 어눌하다 해도 그런건 어른이 된 성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스스로 장도 보고 요리도 좀 하고, 은행가서 일 처리도 하고, 대중교통도 이용할 줄 알아야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거든요.  제 아이도 유독 자조가 안 되는 게 여러 부분 있었어요. 오죽하면 초등학교 가기 전에 기저귀나 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요.


주변의 도움과 각고의 노력으로 기본적인 건 된 초등 입학 전에 잡아주었는데요. 부끄럽게도 끝까지 잘 안되었던 게 대변 후 뒤처리였어요. 분명히 자기 몸에서 나온 배설물인데 그간 제가 보여준 반응 탓인지 자꾸 더러워서 자기 손으로 닦고 싶지가 않대요. 휴지를 둘둘 말아서 잘 이용하면 손에 절대 묻을 일 없다고 여러 번 말해줘도 "더러우니 엄마가 닦아주라"고만해요. 엄마가 진짜 언제까지 니 똥 닦아줘야 하냐고 불평하면서도 저는 또 받아줬네요.


<슈퍼히어로의 똥 닦는 법> 책을 사서 같이 여러 번 읽어보고, 그 뮤지컬 공연까지 보러 가고, 처음부터 끝까지 시키지 않고 단계별로 나눠서 그 단계 중 하나라도 해보기 식으로 계속 노력했더니 이제 큰 일을 보러 갈 때도 혼자 가고 혼자 처리하고 나오네요. 아직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면 엄마가 와서 확인해 달라고 하긴 하는데, 전에 비하면 거의 전단계를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 엄청난 발전이에요. 혼자서 대변을 처리 못하면 또 문제가 되는 게 학교에 있을 때 갑자기 마려우면 아이가 너무 당황할 것 같은 거예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큰 일을 잘 보진 않지만 그래도 이게 자연의 현상이라 조절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 테니 최소한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연습시켜줘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또 하나 자조 면에서 발전한 부분은 혼자서 샤워를 한다는 거예요. 초2정도 되면 샤워 정도는 혼자 할 것 같지만 막상 이것도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요. 물을 자기 몸에 뿌리고 거품을 샤워볼에 묻혀서 몸에 바르는 정도는 8살 때에도 하긴 했는데요. 샤워 과정 중에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물 온도를 스스로 조정하는 거예요. 몸에 닿아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의 물온도가 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딱 맞는 온도가 되었다 싶으면 몸에 물을 뿌려야 하고요. 샤워볼에 샤워거품을 내고 온몸에 문질러야 하는데, 제 손이 안 가면 등은 아이의 손이 거의 닿지를 않더라고요. 등이며 발바닥이며 속시원히 문대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답답한 마음에 제가 대신해주던 세월이 길었습니다.


요새는요? 그냥 좀 참습니다. 등 좀 덜 씻기고, 발 좀 덜 씻기면 어때요 혼자 샤워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하나 플러스가 되는걸요. 어찌어찌 샤워를 다 마치고 나면 수건도 혼자 닦게 두는데, 참 답답합니다. 제대로 안 닦인 부분이 넘쳐나는데도 다 닦았다고 욕실에서 쓱 나와버리니까요. 물이 흐를 것만 같은 등 정도만 슬쩍 닦아주고 이제는 내버려 둡니다. 혼자 샤워하기를 해내니까 그 시간에 저는 설거지를 할 수도 있고, 부엌일 하나를 더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여유로운지 몰라요. 이런 과업들을 진작에 해낼 수도 있었는데, 외동이라 한 아이에만 집중하게 되다 보니 엄마인 제가 해주는 부분이 더 컸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발전한 점은 이제 우리랑 같이 어른 치약을 사용한다는 거예요. 항상 어린이용 치약을 사용했는데 점점 먹는 음식도 어른과 비슷해지는데 굳이 초2까지 돼서 어린이 치약을 사용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어요. 같이 여행 가거나 할머니집 갈 때도 따로 어린이용 치약을 챙기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더라고요. 그런데 어쩌다 어른 치약을 맛보게 되면 너무 맵다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절대 거부하더라고요. 이제는 진짜 어른용 써도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 날, 어린이용과 어른용 절반씩 섞어서 한 번 시도해보게 했어요. 의외로 큰 거부감 없이 하더라고요. 섞어서 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어른용 치약만으로 양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죠?






또래 관계

제 아이에 대해서 가장 걱정이 큰 부분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사회성일 거예요. 그중에서도 바로 또래관계요. 유아기에 발달지연을 판정받고 언어가 느려서 답답하던 시절에도 어른 가족이나 사촌 형들과는 나름대로 상호작용이 되던 편이었어요. 그건 아마도 어른들이 아이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고, 이하면 어하고 척척 알아주려고 노력하니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요. 언어 표현이 참 답답하다는 느낌은 늘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호작용이 안되는 것도 아니라서, 마음을 놓은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항상 아이를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또래 관계예요. 이 점을 유치원 선생님도 가장 우려해 주셨고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잘하지 못하더라고요. 받아칠 줄을 모르고 친구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7세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상호작용 하기를 포기하고 먼저 말을 걸지도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어요. 그제야 부랴부랴 사회성 그룹수업을 알아본 참 눈치 없는 부모였네요 저는. 그래도 몇 년간 다방면에서 노력한 끝에 최근에는 또래 친구들과도 그럭저럭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참 눈물 나게 감동스러웠죠. 친구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볼 때의 그 희열감이란. 말로 표현 못합니다.


짧은 대화에서 끝이 나면 안 되고 어떤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진짜 의미 있는 소통이 이어져야 하는데요. 요즘엔 그 부분도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 반에서 친한 친구가 한 명 생겼는데 하교 후에는 한 번씩 그 친구 집에 가서 놀고 오기도 해요. 그 친구도 외동이라 외로움을 많이 타기도 하고 활발한데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어서 친구 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거든요. 다행히 그 친구와 아이가 성향이 좀 맞는지 같이 수수께끼나 사자성어 이야기하면서 놀더라고요. 친구집에 가봤자 거의 닌텐도 게임만 하다가 오는 것 같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저번에 글을 남긴 적도 있긴 한데 반에서 여자친구에게 고백을 받아서 일주일 정도 연애도 경험해 보았고요. 저번 주에는 정말 놀란 일이 있었는데, 아이가 학원 끝나고 집에 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밖에 찾으러 나가봤거든요. 세상에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더라고요.


처. 음. 이. 었. 습. 니. 다.. 아이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놀이터에 있던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는 일이요. 제게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거예요. 어쩌다가 그 시간에 놀이터에 성향이 유순하면서도 적당히 활발해서 아이와 놀기 딱 좋은 친구들 두 명이 있었더라고요. 평소 같으면 소심해서 또래아이들이 놀고 있어도 놀자는 말 한마디 못하고, 간절하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지나오는 녀석인데 그날은 어찌 자연스럽게 합류가 되었나 봐요. 30분 정도 그 친구들과 이런저런 놀이를 하면서 놀더라고요. 그 모습을 저는 먼발치에서 바라봤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놀이치료도 사회성 수업도 없을 겁니다. 센터 다니면서 시간당 5-6만 원 들이면서 받는 치료수업보다 몇 곱절 더 값진 사회성 배움의 장이지요.


부모님들이 놓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놀이터"에 대한 오해입니다. 놀이터는 놀이하는 곳이기에 아이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터는 굉장히 어려운 장소입니다. 놀이터는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함께 존재하고, 기존에 터를 잡고 있는 아이이들과 계속 바뀌는 아이들의 무리가 섞이는 곳, 그리고 행동이 빠르고 강한 아이들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며 놀이하는 곳이지요. 상대적으로 관찰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고, 선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부담스럽고 과도한 자극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불안이 많은 아이, 이다랑>


이처럼 놀이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저 놀기 좋고 편한 공간은 아닙니다. 제 아이가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논다는 것. 저는 평생 안될 줄 알았거든요. 물론 유아 시기부터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매일 놀이터에 데리고 나갔지만 정말로 함께 어울려서 논다는 느낌은 거의 받은 적이 없고 아이들 분위기에 휩쓸려 끌려다니거나, 매우 친절한 친구 한 명의 배려로 놀이 중간중간에 가끔 끼어주는 정도였어요. 그나마도 최근에는 그 아이들이 학원스케줄로 바빠지면서 놀이터에 나가도 놀 친구들이 없었고요.


하지만 엊그제 아이가 놀 때의 모습은 여전히 친구들 하자는 대로 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나름 대등한 관계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아이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저는 사교육, 학원 다 안 보내고 아이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몇 시간씩 놀아준다면 놀게 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에 온 날은 떼도 덜 부리고, 밥도 잘 먹고, 숙제하라고 하면 자기 할 일도 큰 불만 없이 해내더라고요. 아이에게 있어 놀이의 힘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이의 발달장애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아동발달분야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어른의 개입 없이 신나게 놀 줄 아는 아이가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사실을요.


최근의 아이의 사회성에 있어서 고민이 뭐였냐면, 사회성 그룹 수업에서처럼 선생님이 있고, 뭔가 해야 할 보드게임이 있는 구조화된 분위기에서는 아이가 상호작용도 하고 좀 어울릴 줄 알게 되었는데요. 이상하게 전혀 규율이나 규칙이 없고 어른의 개입이 없는 비구조화된 상황, 한마디로 놀이터에서 친구들끼리만 있을 때는 어울리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더라고요. 어느 타이밍에 끼어들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자기 의견은 어떻게 내고 관철시키는지, 아이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해내기 어려운 커다란 숙제처럼 보였어요.


이 문제에 관해서 병원 의사 선생님께서 정기진료 때 말씀 드리니 사회성이 느린 아이들이 원래 이렇게 비구조화된 상황에서 적응을 가장 어려워하고, 이게 가장 발전된 단계의 놀이 방식이라고 하더라고요. 와.. 그때 깨달았죠. 저 어렸을 적 밖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네 언니, 오빠, 친구, 동생들과 한데 어우러져 이거 저거 하면서 놀던 게 그냥 헛시간이 아니었구나. 그게 다 쌓이고 쌓여서 사회성이 생기고, 규칙을 이해하고, 체력도 좋아지고, 사람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구나. 요즘에는 그런 놀이문화가 사라져서 아이들이 더 스트레스를 받나 싶기도 하고요.


여전히 또래 관계에 있어 서투른 면도 있고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의 남다름을 인지하던 시기부터 저의 목표는 아이가 학교 들어가면 반에서 성향 맞는 친구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였거든요. 어찌 보면 이미 그 꿈을 이루었는지도 몰라요. 더 욕심내면 안 되는데, 이제는 같이 어울려 놀 친구 두세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이렇게 오기까지 아이도 저도 참 많이 울고 좌절하고 힘들기도 했는데 남들이 상하곡선에 큰 변동 없이 스무스하게 성장곡선을 그린다면, 우리는 좀 크고 굴곡지고 삐뚤빼뚤한 곡선을 그리면서 지나온 것 같아요. 그래도 기특한 건 어찌 됐든 성장은 해나갑니다. 조금 느리고 서투른 방식이지만, 그래서 부모인 제가 더 노력할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다..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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