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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Nov 28. 2023

우리 엄마는 술고래예요

제가 그렇다고 합니다

아이는 매주 발달심리센터에서 사회성 그룹 수업 치료를 받고 있다. 벌써 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센터 대기실에는 아이들 치료를 받기 위해 데리고 온 보호자들로 늘 북적하다. 가끔은 조용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이번 주에는 또 어떤 문제로 아이가 힘들게 했는지, 일상생활에서 발견된 새로운 문제행동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함께 해결방안을 고민해 주거나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40분 정도 수업이 진행되고 나면 선생님께서 피드백을 주러 오신다. 오늘은 어떤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는지, 아이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고 어느 정도 따라왔는지, 또 그 과정에서 각자의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신다. 아이들끼리의 의미 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난 지점은 어디인지 자세히 덧붙여 주시기도 한다.


초반에는 이 피드백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센터 수업을 받고 오는 날이면 늘 기분이 우울했다. 눈에 띄는 아이의 문제 행동이 수업에서 나타나는데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집에서 부모님이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구체적인 과제도 내주면, 받아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참 뭣 같다. 특히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도 어떤 아이는 수업 참여도도 좋고 태도도 좋은데 내 아이만 울거나 떼를 썼다거나 수업 활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웠다고 하면 괜스레 더 비교가 되면서 우울하다. 아이 앞에서는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괜히 퇴근한 남편한테 불통이 튀어서 온갖 짜증과 화와 눈물까지 보이며 힘듦을 시전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점점 부정적 피드백의 횟수가 줄어들기는 한다는 사실이다. 처음 1년은 매번 갈 때마다 문제점 투성이의 피드백이었다면 2년 재에는 두 번 갈 때마다 한 번씩이었던 것 같고, 올해에는 문제행동이 보이긴 하지만 친구들과 엇비슷하거나, 덜 심각하고 조금은 봐줄 만한 수준으로 변모했다. 그래도 여전히 피드백 시간은 긴장된다. 나만큼이나 함께 수업을 듣는 엄마들도 매우 심각한 얼굴로 오늘의 아이의 행동은 어떠했는지 들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 피드백 타임에 임한다.


오늘의 주된 활동은 단어 연상 게임이었다. 어떤 힌트를 주고 특정한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게임을 몇 가지 했는데 아이들이 이 부분을 상당히 어려워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각 아이들의 활동지를 엄마들에게 나누어주고 수업 과정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는지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만약 어떤 아이가 오늘 심하게 울고 떼를 썼다고 하면, 아이의 엄마는 속이 상하고 힘들게 뻔하다. 그래서인지 암묵적으로 우리는 누구의 칭찬이 나오든, 누구의 문제행동이 나오든 크게 반응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로 진지하게 듣기만 한다. 만약 선생님이 오늘은 내 아이가 큰 문제없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라고 하면 기분은 좋지만 크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도 그렇고 다른 엄마들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행여 수업을 잘 소화하지 못한 다른 아이들의 엄마를 배려하려는 서로의 노력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그룹 수업이 좋고 이러한 이유로 몇 년째 이어져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단어 연상 문제를 내고 퀴즈를 맞히는 활동을 했다는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른 아이들은 구급차 같은 일반적인(?) 단어를 문제로 내고 맞추게 했는데 내 아이의 써놓은 단어는 가히 놀랄만했다.


커다랗게 자음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눈에 띈다. 아이가 친구들에게 낸 문제의 자음은 "ㅅㄱㄹ"였다. 친구들이 쉽사리 맞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힌트를 달라고 하니 아이가 한 말은 "우리 집에 살아요." 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 산다니? 뭘까? 다들 심각하게 단어를 연상하는 가운데 결국 맞추지 못해서 답이 공개되었다.


답은 술. 고. 래. 였다.


몇 년째 그룹 수업을 하고 있지만 이 심각하고도 진지한 피드백 시간에 크게 웃음이 나온 적은 내 기억에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선생님을 포함해서 모두가 빵 터져서 크게 웃었다. 선생님은 약간 민망해하시면서 아이에게 엄마, 아빠 중 누구냐고 물어봤다고 부연 설명을 해주셨다. 나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나 이외의 다른 엄마들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분들이다. 나도 술을 마시긴 하지만 쓰디쓴 소주는 입에도 못 대고 맥주나 와인은 가끔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술고래라고 소개하다니.. 하고 많은 단어 중에서 왜 하필 그 단어란 말이냐..?


고백하자면, 사실 최근에 와인을 좀 많이 마시긴 했다. 진짜 와인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수준은 못 되고 샴페인 느낌의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에 꽂혀서 몇 주째 거의 매일 밤 두세 잔씩 마신다. 퇴근이 늦은 남편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저녁을 차리면서, 부엌일을 하면서 와인잔에 반틈 채워놓고 홀짝홀짝 마신다. 그러고 있으면 왠지 부부의 세계의 김희애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기분도 살짝 들뜬다. 이래서 다들 와인을 마시는 건가? 맥주는 탄산이 너무 세고 조금만 마셔도 배가 불러서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소주는 원래 입에도 안 대는데 와인이야말로 내가 즐기기 아주 적합한 술이 아닌가? 뒤늦은 깨달음에 나는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와인코너를 기웃거렸고 기어코 한 병씩 사 와서 마셨다.


아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술을 너무 자주 많이 마신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이래서 부모가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구나 싶다. 집에 와서 아이를 붙잡고, "엄마 술고래 아니야! 진짜 술고래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같이 소주를 몇 병씩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들이야.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이는 원래 듣고 싶은 말 외에는 그다지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성향이 아니라서 "어, 그래? 알겠어. "하고 만다. 괜히 억울해진 나는 다음부턴 밖에서 엄마 술고래니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술을 마신다고 하면 남편이 훨씬 주량이 센데 억울하다. 그래도 중요한 차이라고 하면 아빠는 가끔씩 밖에서 회식할 때만 술을 마시지, 집에서는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다. 집에서 자주 마시는 모습을 보는 건 아무래도 엄마이다 보니 엄마=술고래라는 공식이 머리에 새겨졌나 보다. 억울하다 정말. 매일 저녁 마시는 와인 한 잔으로 육아 스트레스도 풀고 하루의 긴장감도 해소시키고 꽤나 행복했는데 아무래도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아예 끊지는 못하겠고 일주일에 한두 번만 마시는 걸로.. 해야겠다. 아예 끊는다는 다짐은 못하겠는 걸 보면 이미 중독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이게 바로 전형적인 술고래의 모습인가? 진짜 애 앞에서는 어떤 행동이든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는 반성도 잠시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와인 한 잔 하는 여유도 허락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아들.. 엄마 술고래 아니야 진짜..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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