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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an 03. 2024

아이가 받은 롤링페이퍼를 보니

저 잠시만 눈물 좀 닦고 올게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가방에서 롤링페이퍼를 발견했다. 현재 배우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친구에게 진심의 마음을 담아 칭찬하기 내용이 나오는데, 그 연계 활동으로 수업시간에 한 활동지였다. 선생님께서 활동전에 진심을 담아서 구체적으로 칭찬"만"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는지, 정말 롤링페이퍼는 칭찬으로 가득했다. 보통의 초2아이들이라면 장난말이나 농담들로 채워질수도 있었을텐데, 선생님께서 얼마나 단단히 일렀는지, 정말 학습목표에 맞게 칭찬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넋이 나간채로 아이가 받아온 롤링페이퍼를 한 없이 바라보았다. 친구들이 써준 한 문장, 한 마디가 내 마음속에 깊이 와닿았다. 반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 아이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어서. 그리고 이런 칭찬을 들은 만큼 학교생활을 해내준 내 아이에게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기만큼 오기까지 나는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감내하며 견뎌왔던가.


반친구들이 써준 문장들 하나하나 고이고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래봐야 9살 아이들이 쓴 거라 진심을 다하지 않을 내용일 수도 있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썼을 수도 있지만 일단 그런 부분에 대해선 무시하련다. 문장에 담긴 그 뜻, 그 의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OO아, 너는 책 읽기를 잘해.


OO아, 너는 수업 시간에 시험을 잘 보는구나.


넌 축구를 잘하는구나.


너는 축구 연습을 많이 하구나.


너는 영어 책을 잘 읽는구나.


너는 소설이나 발표를 잘해서 항상 박수를 받아!


너는 발표를 엄청 잘한다.


너는 책을 엄청 잘 읽어.


너는 마음씨가 좋고, 달리가, 줄넘기, 발표도 잘해.


너는 영어책을 잘 읽어.


너는 발표를 잘하는 것 같아.


넌 발표를 잘해!


넌 반장 역할을 잘해.


너는 공부를 잘해.


너는 손이 빨라서 만들기를 잘해.


너는 친구가 많아서 부러워.


너는 시험을 잘 보는 것 같아서 부러워.


너는 공부를 잘해.


너는 마음씨가 착하구나.



언어발달지연으로 또래랑 의사소통도 잘 안되고, 자기표현도 제대로 안되었던 아이인데 친구들이 발표를 잘한다고 칭찬해 준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다. 지금도 여전히 화용적인 면에서 서투름이 존재하고, 느린 처리속도 때문에 말하다가 약간 더듬을 때도 있다. 그래도 학교에서 발표를 시킬 때는 미리 글을 쓰고 나서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다음 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 약점이 덜 드러난 것 같다.


무엇보다 학급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 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실제 초등학교 공개수업에 가보니, 평소에 밖에서 놀 때는 굉장히 활달하고 외향적이던 아이들도 발표시간엔 굉장히 떨기도 하고 잔뜩 긴장해서 말을 더듬기도 했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보통 아이들에게도 발표는 쉬운 과업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발표 내용은 비록 별 볼일 없다고 해도 떨지 않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임하기만 해도, 발표를 잘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 마음에 잔잔한 폭풍을 안겨준 문장은 바로 "너는 친구가 많아서 부러워"였다. 내 아이가 친구가 많다니? 사회성이 없어서 그룹 치료를 받고 있고 여전히 친구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많은데.. 반에서 친구 한 명 없이 쉬는 시간마다 종합장에 그림이나 그리며 지낼까 봐 늘 노심초사하는 게 내 일인데.. 친구가 많아서 부럽다니? 이건 정말 사실일까. 내 아이에게 쓴 글은 정말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어서 이 문장을 다시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이 글을 써준 친구는 여자아이로 야무지고 당찬 아이였다.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해서 잘 못 쓰는 실수를 할 거 같지는 않은데.


아이가 정말 친구가 많은 걸까. 반친구가 보기엔 친구가 많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여러 명의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낸다는 뜻일까. 대화도 하고 자연스럽게 상호작용도 하면서 같이 논다는 말일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간다. 담임선생님께서도 혼자 그림 그릴 때도 많이 있지만 보드게임 같은 걸 하면서 친구랑 놀 때도 있다고 안심시켜 주시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걱정이 되었다.


사뭇 감격스러웠다. 지금까지 해온 몸고생, 마음고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정도면 나 이제 한시름 놔도 되나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가져본다.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은 일반 공립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부적응할 거 같으니 대안 교육이나 소규모 혁신학교 아니면 해외로 데리고 나가는 건 어떻냐고 아주 에둘러서 조심스레 제안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밤새 울었고 며칠을 마음고생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 정말 안 될 줄 알았다. 포기해야하는데, 아이의 현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자꾸만 헛된 기대만 품는, 현실자각 못하는 못난 부모가 되버린가 아닌지 자학했다. 아이는 영영 친구들과 섞이지 못하고 평생 겉돌기만 하는, 소위 은따로 학교 생활을 할 줄 알았다. 그만큼 유치원 때 아이의 사회성 수준은 절망적이었다.


장기간의 고심 끝에 일단 집 앞 공립초를 보내보고, 영 적응이 어려우면 다른 옵션을 두고 알아보기로 했다. 입학도 못 시켜보고 지레 겁먹어서 정규교육과정을 피해 가는 것은 아이에게도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간 학교생활에서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동안 몇 달간의 등교 거부 때문에 몇 달을 아이도 나도 마음앓이를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결국 이렇게 적응해 가는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멀지만, 반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 한 장이 나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위로를 안겨다 준다.


아이가 느리고 답답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 고생하는 부모님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잘 클 거라고 희망고문은 하고 싶지 않다.


남들보다 우여곡절도 더 많을 거고, 더 많이 돌아가야 하는 성장곡선을 겪을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부모에게 보답하듯 성장하는 모습도 보여줄 거라고. 너무 큰 기대를 걸고 꼭 장애를 극복해 내서 아이를 정상으로 만들어놓고 말겠다는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금방 지치고 만다. 한 단계씩, 그것도 아니면 반 계단, 반의 반 계단씩 올라가겠다는 마음, 가다가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면 쉬어가면서 마음 졸이지 않고 기다려보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와 아이도 여전히 여러 난관 앞에서 진행형이고, 아직 어려운게 많다. 그래도 반친구들에게 받은 롤링페이퍼가 "그간의 내 마음고생과 노력"에 대한 일말의 보상이 되어준 것 같아서 감회가 남다르다. 올해 산타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내주는 선물은 이 롤링페이퍼 한 장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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