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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Feb 11. 2024

십년만에 남편이랑 데이트하기

이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나세요

명절을 맞아서 양가 가족들을 만났다. 늘 그렇듯 아이는 사촌형아들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계속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명절이면 으레 조카네 집에 가서 놀고 잠까지 자고 오는 걸 기대하는 아이인데, 형님네 눈치도 보이고 조금 미안하기도 해서 이번엔 좀 자제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소용없었다. 아이는 엄마, 아빠랑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미련 없이 형아들을 따라나섰다.  


막상 아이가 없으면 나와 남편은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엄청나게 여유로워진다. 그 한가함이 낯설고 어색해서 한동안은 아무 말없이 서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타지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누군가 우리 애를 자주 돌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항상 무얼 하든, 어딜 가든 아이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지인들은 애 낳고 나서도 친정이나 시댁이 가까이 있으면 애를 맡기고 둘 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경우도 많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근 10여 년간 단 둘이 영화를 본 적도 없다.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가 임신 상태에서 봤던 인터스텔라였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 년에 몇 번은 그래도 친정이나 시댁 식구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봐줄 때가 있었다. 우리 둘만의 자유가 최소 네다섯 시간, 혹은 하루 통째로 주어진 적도 없지 않다. 한 번은 남편이 둘이 나가서 맥주 한 잔 하고 올까?라고 했는데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의 이유는 명백했다. 애가 아무리 눈앞에 없다고 우리가 그 틈을 타서 술이나 마시고 즐기면 되냐고, 애 걱정은 안 되냐고, 아무리 믿을만한 가족들에게 맡겼다고 해도 애가 잘 놀지, 잘 적응할지 걱정이 돼서 나는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단박에 거절했다.


한 번은 단 둘이 삼겹살 집에 가서 술도 시켜놓고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나보다 유독 남편이 더 형네 집에서 자기로 한 애 걱정을 하는 바람에 더 밥맛이 뚝 떨어졌다. 오랜만에 남편이랑 맥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남편은 갑자기 애가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전화 올까 봐 술을 못 마시겠다고, 만에 하나 술을 마시면 운전을 못 하지 않느냐는 합리적인 이유를 댔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이를 가족에게 맡겨놓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맛있는 식당에서 구운 삼겹살이 돌맛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앉은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금방 고기가 익기 무섭게 먹어치우고 나와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별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각자 잠이 들었다.


그 후로 아주 가끔 단 둘만의 여유로운 시간이 허락되어도 우리는 각자 방에서 할 일을 하는데 익숙해졌다. 애가 아직 느려서 걱정할 것도 많은데, 애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끼리 즐기고 논다는 건 감히 시도해 볼 수 없는, 시도해서도 안된다는 그런 무언의 압박이 존재했다. 차라리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 갔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옭아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우리 둘이 함께하는 휴일이나 자유시간에 아이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그 시간을 즐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우리에게는 죄책감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 같다. 발달에 문제가 있는 아이를, 아직 언어표현이 능숙하지 않아서 서툴고 대화가 답답하기만 한 아이를 가족이라지만 남의 손에 맡겨두고 우리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건 부모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는, 우리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부모라는 죄책감 말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되려 친정엄마는 둘이 나가서 바람 쐬고 오라고 재촉도 하셨지만 선뜻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가 사촌들과 즐겁게 웃으며 놀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사뭇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아이가 조카네 집에 간 동안 극도로 할 일이 없어져서 스마트폰만 들여보고 있었다. 하필 책도 집에 두고 와서 읽을 책도 없어서 친정집 안방에 누워 스마트폰과 TV에서 하는 재미없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지루해졌는지 드라이브라도 하러 나가자고 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애도 조카네 집에서 잘 놀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터라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선뜻 동의를 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남편이 어디 가볼 만한 신상 카페 있는지 검색해 보라고 한다. 자동차 앞자리에 둘이 나란히 앉는 것도 어색하고, 둘만 갈 수 있는 카페를 검색해 보는 것도 어색하다. 그냥 평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페에 가자고 했다.


단 둘이 카페에 들어가 테이블을 잡고 앉아 주문을 하는데, 어찌나 어색했는지 모른다. 도대체 남편이랑 이렇게 둘이서 차를 마시로 온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서 한참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아이스크림이 살포시 얹어진 부드러운 크로플을 나이프로 자르면서 평소 같으면 아이 입에 넣어줄 것을, 남편 입에 넣어주었다. 헉,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우리 둘이 데이트하는 거 같잖아?


결혼 전에 몇 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셀 수도 없이 자주 데이트를 했을 텐데, 그때는 일상이었던 일이 지금은 어쩜 이렇게 비일상적인 이벤트가 됐단 말인가. 우리는 거의 처음으로, 아이 걱정보다는 다른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봤자 서로의 친구나 지인들에 관한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어차피 데이트하면서 뭐 얼마나 중요한 사안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카페를 나와 주변 거리를 산책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았다. 뭐 할까 고민하다가 영화 보러 가볼까 했다. 우리 둘이 영화관이라니.. 이게 몇 년 만의 일인가. 둘 다 대단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돌이 성향의 남편 덕에 연애하면서 데이트 때 하는 일이라고는 거의 밥 먹고 영화본 일 밖에 없다. 그 외의 뭔가 특별하고 스펙터클한 데이트를 해보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몇 번 싸우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했는데 헤어지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엄청 좋아하긴 했나 보다. (급고백)


아무튼 그때는 영화 보는 게 세상 가장 쉬운 일이고, 우리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즐길거리였는데,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아예 못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기회는 있었지만 감히 시도하지 않았다. 정말 큰 마음먹고 영화관을 향했다. 보고 싶었던 <서울의 봄>이 특별 연장 상영 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애매해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만 볼 수 있었다. 그냥 보지 말고 되돌아갈까 하는 걸,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다리다가 보고 가자고.


결국 영화를 보게 되었고, 혹시라도 급히 아이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수시로 무음으로 해놓은 폰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아이 생각이 별로 나지 않을 만큼 영화가 몰입도도 높고 재미있었다. 역사에 해박한 남편은 연애 때도 역사 관련 영화를 보면 늘 보고 난 후에 배경지식을 피를 토하면서 설명해 주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게 정말 얼마만인가.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걱정도 고이 접어두고 오롯이 남편과 둘이서 카페를 가고 영화를 본 게.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소소한 데이트였는지도 모른다. 일을 전부로 여기는 남편이 미웠고, 발달장애인 아이를 일 핑계로 많이 돌봐주지 못해서 미웠고, 나를 타지로 데리고 와서 고생시켜서 미웠다. 남편은 남편대로 애한테만 집착하는 나에게 불만이 쌓였을지 모른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아주 가끔, 몇 달에 한 번씩이라도 둘 만의 시간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서로를 애엄마, 애아빠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애하던 때처럼 그냥 나와 너로 마주 보며 대화도 나누고 손 잡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면. 아마 서로 날 선 상태로 싸우는 일이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계획에 없던 데이트를 남편과 한 일은 아주 잘한 선택인 것 같다. 딱히 애정지수가 올라간 것 같지도 않고, 이제는 서로 가족이라는 책임감과 의무로 더 묶여있는 사이지만, 뭐랄까 다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 약간의 활력소가 된 기분이다. 가끔은 애 맡기고 데이트 좀 하자고 졸라야겠다. 이제는 둘이 다니면 풋풋한 연애사이라기보다 중년의 부부 느낌이 더 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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