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습니다만
비 오는 날이 좋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 옛 생각에 젖어 감상할 수 있어서..?
애절한 첫사랑 선배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철 지난 가요를 들으며 차 한잔 할 수 있으니까..?
전혀, 아니올시다.
내가 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바로 가습기를 안 틀어도 되기 때문이다.
임신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아이를 키울 때 습도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를 붙잡고 말해 준 사람이 없다. 언뜻 지나가던 직장 동료가 신생아는 습도에 민감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건 이미 아이가 꽤나 신생아 티를 벗은 후에 떠올랐다.
평생 나 쓰자고 따로 가습기를 들여본 적도 없고, 엄마가 내 방에 가습기를 틀어준 적도 없다. 집에서 제습기는 봤어도 가습기를 따로 본 기억이 없다. 아주 건조할 때는 그냥 무심하게 젖은 수건을 널어두는 걸 본 기억은 있다.
우리 집에 오신 산후 조리사님도 신생아였던 아이를 돌봐주시면서 가습기를 챙겨주시긴 했는데 나는 그 당시 습도 조절이 아이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가습기를 매일 부지런히 통을 씻어내고 비워서 작동시키지 않았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돌렸다 말았다 했던 것이다.
온도 습도기가 있어야 된다기에 샀지만 수시로 옆에 두고 체크하지는 않았다.
몇 번의 감기를 겪고, 보일러 난방으로 인해 건조해진 방을 직접 겪으며, 환절기를 지나오면서, 어린아이 키우는 친척과 지인들 집에 가보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가습기는 엄청나게 중요한 필수품이라는 것을.
특히 난방을 켤 수밖에 없는 겨울철과 건조한 계절에는 꼭 가습기를 작동시켜 두고 자야 한다는 것을.
가습기도 바닥에 두는 것보다는 아이가 자는 침대 높이에 맞춰서 올려두면 더 가습 효과가 좋다는 것을.
뒤늦게 하나씩 경험으로 배워갔다.
책으로 읽고 공부한 육아서에도 이런 내용이 나와있었겠지만 직접 보고 들었을 때 학습 효과가 커져서 바로 실행하게 되었다.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는 가습기를 하나 구매했다.
건조한 계절이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난방을 시작하는 11월쯤부터 봄 환절기가 끝날 4월 말 정도까지는 가습기가 필수다. 비 오는 날 빼고는 절대 없으면 안 된다.
그럼 가습기 관리는 누가하나?
내 일이다.
안 그래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적이 있던 만큼 더 잘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피해 잘들의 상황을 보면 살균제 영향도 크긴 했겠지만, 공기 중으로 나쁜 성분이 계속 흘러나왔을 때 어린아이의 연약한 호흡기관에 주는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 악질적인 사건을 보고 가습기 관리를 정말 잘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학습했다.
이래저래 찝찝하므로 살균제는 아예 쓰지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습기 통을 들고 욕실로 가서 물로 깨끗이 구석구석 헹구고 세척한 다음 잘 건조될 수 있게 뒤집어서 말린다. 저녁에 취침 시간이 될 즈음에는 건조된 가습기에 물을 일정량 채워서 들고 아이가 자는 침실로 들고 간다.
이게 내가 하는 가습기 관리의 전부이고 매일의 루틴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너무 귀찮다.
이것 좀 안 하고 살고 싶다.
설거지하듯이, 청소기 돌리듯이, 이제 그만 좀 적응이 될 때도 됐는데 매일 가습기 챙길 생각만 하면 힘들다기보다는 귀찮아서 죽을 것 같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긴 한다.
이 귀차니즘에 단비가 되어주는 때도 있으니, 바로 어제,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이면 굳이 높아진 습도에 또 가습기를 더할 필요가 없다.
가습기 세척 및 준비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내가 해야 할 그날의 집안일 리스트에서 하나가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다!
오예!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오늘은 비 오니까 가습기는 안 해도 되겠지?"
재차 확신을 얻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해보지만 남편과 아이는 관심조차 없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다.
혹시 비가 왔어도 실내는 보일러를 틀어서 건조할 수 있으니 가습기를 틀어놓고 자라고 할까 봐, 괜히 해본 소리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관심이 없는 건지, 내 말에 동의한다는 건지.
아무튼 연이틀 비가 내린 덕에 가습기로부터 해방되어서 좋다.
혹자가 보면 그거 준비하나 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게으름뱅이라고 비난할까 봐 좀 무섭긴 한데.
주부로서의 내 게으름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인 것 같긴 하다. 그건 인정한다.
소심하게 외쳐본다. 어디 나 같은 분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