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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07. 2024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못난 자존심 때문에

올해 또 휴직을 연장하게 되었다. 처음 휴직을 들어갈 때는 딱 1년, 길면 1년 6개월 정도하고 복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그건 철저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니 유치원, 어린이집 시절보다 훨씬 더 손이 많이 갔다. 초등학생들은 하교시간이 워낙 빠르기에 오후에 돌봐주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이유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매일 약물 복용, 센터 치료와 병원 진료 등의 일이 더해지니 아무래도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원 다닐 때에도 이모님이 아침 오후에 오셔서 봐주긴 했지만, 고작 두세 시간 안팎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학교, 학원 외에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빈 시간을 다 이모님에게 맡기려면 비용이 두배로 들게 된다. 박봉의 월급 받아서 이모님에게 절반 이상을 주어야 하고, 아이를 맡기는 입장에서 눈치도 봐야 하고, 나는 나대로 늘 피곤하고 일에 찌들어 일과 육아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외줄 타기를 해야만 한다. 여러모로 일단은 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돌보고,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게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육아휴직 연한은 진작에 아이 어려서 다 썼고, 나는 또 다른 명목의 휴직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직계가족이 질병으로 인해 아파서 부득이하게 간병인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휴직이 있다. 그 휴직을 내려면 아이의 진단서와 간병 계획서 등 적지 않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병원에 가서 발달장애로 인해 돌봄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명시된 진단서를 떼고, 휴직 서류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은 몹시 마음이 상하고 여전히 힘들다.


그냥 서류로만 확인해 주면 될 것을 또 아이가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 하는 관리자들도 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교장실에 붙잡혀서 위로 아닌 위로와 인생사에 대한 기나긴 담화를 나누고서야 서류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일련의 불편한 과정만 겪고 나면,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종류의 휴직을 낼 수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다. 무급휴직 이기는 하나 덕분에 마음 편히 아이에게 올인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휴직을 내고 집에 있는 나의 신변에 대해 주변에서 상당히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남들은 왜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는 엄마들이 올해는 복직하느냐, 그럼 아직 그 학교 소속인지 등을  물었다. 사실 나는 이 대화가 굉장히 불편했다. 아이 어렸을 때 육아휴직을 다 쓴 걸 아는데 또 휴직을 계속해서 내고 있다고 하면 대체 어떤 휴직이냐고 행여 물어볼까 봐 두려웠다.


조기개입과 지속적인 치료, 그리고 나의 정성스러운(?) 돌봄으로 인해 아이의 상태는 많이 좋아진 편이다. 유아시기에 언어발달지연도 눈에 두드러졌는데 이제는 좀 화용적인 스킬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된다. 어차피 저학년이라 티도 나지 않지만 학습면에서도 그런대로 따라가는 편이라서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냥 아이가 성격이 소심하고 예민해서 사회성이 좀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센터에 다니는 정도로 알고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다.


소아정신의학적인 진단명을 받고, 약물 복용을 하고 있고, 그 사유로 인해서 휴직을 낸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게 싫다. 최대한 알리고 싶지 않다. 굳이 먼저 자세히 물어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그 아이의 상태를 알릴 필요도 없고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아이의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하는 건 가족과 담임선생님 그리고 치료에 도움을 주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잉행동이 눈에 띄게 심하다거나, 특수교육대상자에 선정되어 도움반에 갈 정도라면 어쩔 수 없이 알려졌겠지만 아이의 증상은 그 경계에서 살짝 빗겨 나 있다. 겉으로 봤을 때 큰 문제가 없다 보니 아이의 진단으로 인한 휴직을 내고 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교직에 있지 않는 엄마들이야 휴직 연한이나 종류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하필 우리 단지에 친한 엄마들 중에는 교사들이 꽤 있다. 그 엄마들과 대화를 하게 될 때에도 애써 휴직에 대한 이야기는 피해 왔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또 휴직을 연장하게 되니 복직을 앞둔 교사 엄마가 나에게 물어봤다. 육아휴직 진작 다 쓴 거 같은데 어떤 휴직을 또 낸 거냐고.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적잖이 당황했다. 갑자기 생각난 말이라고는, 그냥 친정엄마가 몸이 좀 아프셔서 그 명목으로 냈어요. 였다. 그 엄마는 더 자세히 파고들었다.


"그 휴직으로 서류 내려면 가족이랑 같은 주소지에서 살고 있어야 되지 않아?"


"..."


할 말이 없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아무 말이나 해댔다. 그런 부분은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되긴 됐다고.. 중언부언했다.


관리자야 어쩔 수 없이 내 상사이기 때문에 휴직 서류 제출 과정에서 개인사를 드러낸다고 쳐도,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아이가 아파서 내야 하는 휴직 사유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우선 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신이 왜 병원에 다니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 ADHD라는 용어도 알지 못한다. 비록 스스로가 어디가 아프고 혹은 부족해서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어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병명을 알릴지 말지. 그건 우선적으로 아이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일이다. 그럴 기회조차 박탈한 채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진단명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심하게 말하면 인권침해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교사 엄마와 한참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더 이상 휴직에 관한 대화가 이어지지 않게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 엄마가 내 아이가 아픈걸 혹시 알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겹쳐서, 그리고 내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을까 싶어서, 겉으로는 열심히 대화에 열중하는 척했지만 정신이 반 나간 상태였다.


아이의 상태를 숨기는 건 내 못난 자존심 때문인가? 내가 발달에 어려움을 가진, 정상발달보다 부족한 아이를 키운다는 피해의식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도 가끔 뼈에 사무칠 정도로 억울해질 때가 종종 있다. 왜 내 아이가 발달장애인지, 왜 ADHD인지, 왜 언어발달지연인지, 왜 사회성이 늦은 지, 왜 향정신성의약품을 복용시켜야 하는지, 왜 불안장애를 겪어야 하는지, 왜왜왜.. 몇 년째 스스로를 다잡고 단련시키고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일상에서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를 겪고 나면 아직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솔직함을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내야 할 아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나도 그랬다.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뭔가 숨기는 듯 한 사람을 뭔가 알 수 없고 음흉한 사람이라 치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살만큼 살고 보니 그 솔직함이라는 게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절대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끔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선을 긋기 위해서, 쓸데없는 참견을 받고 싶지 않아서, 동정 어린 눈빛을 받게 되는 게 두려워서, 셀 수 없는 이유로 솔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 사회생활하고 살면서 매사에 꼭 솔직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게 요즘 내 지론이다.


평소에 좋아하는 분인데 솔직하지 못한 대화를 하고 나니 기분이 상당히 찝찝했다. 거짓말을 했다는 일말의 죄책감 때문인가.. 여태껏 거짓말 한 번 않고 산 순결무구한 인생은 아니지만 왠지 이번에는 좀 더 신경이 쓰인다.


기독교인으로서 좀 부끄러운 일인가 싶기도 하고.

하느님도 이런 내 마음은 좀 이해해 주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랄 뿐. 다시 한번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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