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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5. 2024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일상의 단상

사회성발달이 느린 아이를 키우는 터라 아이가 친구랑 놀고 싶다고 하면 나는 학원을 기꺼이 빼주는 엄마다. 안 가도 크게 지장 없을만한 학원이라면 흔쾌히 빼주고, 주 1회씩만 한다거나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친히 시간을 변경해 준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친구와 놀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준다.


한때는 아이 입에서 "엄마, 나 친구랑 놀고 올게!"라는 말을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보면 소원이 이루어지긴 한 것 같은데, 친구들이랑 논다고 해도 아직 불안할 때도 많고 겉돌 때도 있고 자기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다가 오는 때도 있어서 뭔가 좀 찝찝하게 소원을 이룬 기분이 들긴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학원 한 번 빠지는 것보다 친구랑 놀이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놀아보는 게 내 아이에게는 훨씬 더 큰 자산이요 성장의 발판이 된다고 믿고 있기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결정하는 편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작년에 그나마 반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다른 반이 되어서 아쉬웠다. 내가 아쉬워하는 만큼 아이는 썩 크게 안타까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보았던 것만큼 작년 같은 반 그 친구와 그다지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고맙게도 그 친구와 친구 엄마는 내 아이와 다른 반이 된 것을 굉장히 아쉬워해주었다. 그 친구는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뛰고 잡고 하면서 몸으로 노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수수께끼 놀이나 아는 지식 늘어놓기 대화를 즐겨하는 성격이라 언뜻 보면 아이랑 잘 맞을 법했다. 중간에 갈등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에서 그나마 소통하며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그 친구 엄마가 다른 반 된 것도 아쉬운데 애들 데리고 키즈카페에 가서 좀 놀게 해 주면 어떠냐고 제안해 왔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평일이었고 하교 후 스케줄이 있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쉽게 변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필 그날 오후 스케줄 중에 하나가 악기 레슨이었다. 매일 가는 학원이면 모르겠는데, 주 1회 집으로 오는 수업이라서 시간 변경이 녹록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선생님께 정중하게 시간 변경을 부탁드리는 문자를 보냈더니 이내 전화가 왔다. 가능하면 시간을 바꾸지 않고 했으면 좋겠는데,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꼭 시간을 바꿔야 하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좀 민망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냥 솔직히 말했다. 애가 원래 친구 사귀기 힘들어하는데 작년에 어렵게 친해진 친구가 이번에 같이 만나서 놀자고 해서, 웬만하면 한 시간 이상 빼서 놀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납작 엎드린 자세로 설명을 드렸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어머니, 시간을 이렇게 바꿔버리면 정해진 스케줄이 있는데 그 빈 시간 사이 동안 저는 차 안에서 다음수업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음번에는 웬만하면 시간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소에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신데 어렵게 나에게 상황 설명을 전달해 주시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애를 친구랑 놀게 해 주겠다는, 아이의 사회성을 조금이나마 향상해 보려는 나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선생님 입장도 십분 이해가 갔다. 날도 아직 추운데 한 시간을 저녁 시간에 차에서 기다려야 하다니. 다음 타임 레슨을 좀 일찍 앞당겨 바꾸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았더니 요즘 아이들 스케줄이 다 꽉 채워져있다 보니 그것도 여의치 않다고 했다.



일단 오늘 레슨은 빼고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마음이 영 불편했다.

아이를 친구랑 놀게 해 주는 것과 선생님과의 수업 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한지 짧은 순간 고민해 보았다. 친구 엄마도 평소 꼼꼼하고 약속 시간에 철저한 분이라서 레슨 시간을 다시 원래대로 하려면 따로 또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냥 친구 엄마에게 연락을 해서 죄송하지만 다른 날을 기약하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한 시간 동안 차에서 기다려야 할 선생님의 상황이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음대를 나와 악기를 전공했고, 레슨을 다니신다. 정말 딱 보면 "음대 나온 여자"느낌이 들 정도로 우아하고 차분하고 말투도 나긋나긋해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속으로 참 편하게 돈 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악기 전공 하나 제대로 해놓으면 이렇게 아이들 일대일로 가르치면서도 시간당 페이도 센 편이고, 레슨 스케줄도 늘 꽉 차 있다고 하는 걸 보면 한 달에 일반 공무원 월급쟁이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 않을까 계산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레슨이 하나 취소되면 어디 갈 데도 없이 차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확 달라진 것이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시간에 맞춰 레슨을 하는 일도 보기에는 편해 보여도 막상 그렇지가 않구나 싶었다. 그리고 물어보니 밤늦게까지 스케줄이 있어서 거의 9시 다 돼서 집에 가는 날도 있다고 했다.


선생님도 초중등생 자녀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럼 아이들은 누가 따로 봐주는 걸까. 뭐, 나보다 상황이 나아서 배우자나 부모님이 도와주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늦은 시각에 귀가해서 살림도 육아도 본인이 마무리할 텐데..


'우아하게 음악 하면서 편하게 레슨이나 하고 다니는 유유자적한 삶'이라는 이미지는 오로지 내 편견이고 선입관이었던 것이다. 나처럼 시시때때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시간 변경을 요청하거나 취소하거나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직업들이 세상 수만가지겠지만, 참 어느 일 하나 쉬운 건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간에, 많게 벌든 적게 벌든 길게 일하든 짧게 일하든 직급이 높든 낮든 간에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는 건 쉬운 게 없다. 다 어렵고 다 저마다 애로사항이 있고 겉보기와 다른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내 형편이 가장 힘들고 내가 가장 불쌍한 존재 같지만 막상 뜯어보면 절대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아간다. 누구나 다 힘들다면 주어진 내 일에 감사하고 그저 묵묵히 해나가는 게, 기왕이면 즐기는 마음으로 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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