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더라
아이를 치료실에 데려다주고 센터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여기는 대기실이 널찍널찍하고 의자 간격도 넓고 깨끗해서 쾌적한 편이다. 아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나에게 꿀 같은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보통은 핸드폰을 보면서 밀린 SNS를 챙겨서 보는데 그러다 죄책감이 들면 챙겨간 책을 꺼내 읽곤 한다. 의자 쿠션감도 좋고 테이블도 딱 적당해서 앉아서 책 보기는 도서관보다 더 좋은 시설이다.
그날 따라 책 내용이 재미없기도 했고 영 집중이 잘 안돼서 폰을 보다가 책을 보다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어느새 내 바로 옆 자리에 한 부부가 앉아 있는 걸 알게 됐다.
'대기실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 왜 내 옆자리람..'
옆에 따닥 붙어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 기울이면 그들의 대화가 여과 없이 다 들릴만큼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그 부부는 앉자마자 사뭇 큰 목소리로 대화를 펼쳐 나갔다. 그때부터 책에 집중하기는 거의 포기한 셈이었다. 눈은 책을 향해 있었지만, 뭐 좀 되는 사람인처럼 책 읽는 척하고 있었을 뿐 내 주의집중은 이미 그들의 대화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그 부부는 쌍방향의 대화라기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식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쏟아내는 쪽은 당연히 아내인 여자였고, 듣는 쪽은 남편인 듯했다. 그 가족도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발달이나 정서상 어려움이 있기에 센터에 데려왔을 터였고 아이에 대한 걱정이 가장 주된 화제였다.
"애가 어디 가서 너희 아빠 취미가 뭐니, 아빠랑 뭘 하면서 노니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알아?
우리 아빠 맨날 집에 누워서 휴대폰 보고 유튜브 보고 아니면 티브이 보는데요? 한다잖아.
이게 지금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해? 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만들면 안 되지.
그게 정말 아빠 역할이라고 생각해?
핸드폰 사용을 줄여야 한다니까.
우리부터 줄여야 애도 집착을 덜하게 되는 거고..
애가 핸드폰을 너무 좋아하잖아..
애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좀 연구를 해야지, 맨날 운동할 생각만 하지 말고..
운동 하루 빼먹으면 어디 덧나니?
그리고 뭐 예전에 우리는 그냥 막 컸다 이런 말 좀 하지 마. 그 시절에는 다 방치되면서 자랐어.
그래도 잘만 자랐다 그런 말 이제 안 통한다니까..
예전이랑 지금 시대랑 같니?
너 시골에서 자라면서 개구리 잡아서 구워 먹고 그런 이야기는 아이가 전혀 공감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꼰대 같은 소리는 할 생각도 하지 말고.. "
그 아내의 말을 옮기자면 대충 이런 식이 었다.
이 외에도 참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 쓰지는 못하겠다.
갑자기 어떤 맥락에서 개구리 잡아 먹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개구리 잡아먹던 이야기하지마라는 말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내분의 말을 나도 같이 듣고 있자니 참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군말 없이 잘 경청하고 있는 남편분의 자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잔소리라기보다 거의 학생 혼내는 듯한 말투로 남편을 대하고 있었는데,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남편분은 그간 지은 죄가 많은지 별 항변 없이 듣기만 했다. 간간이 맞아, 그래, 그렇게 해야지 정도의 추임새만 넣으면서 아내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 남편 같으면 내가 저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아주 난리가 날 거 같은데 남편분은 참 인내심도 좋다고 해야 하나 사람 좋다고 해야 하나 아내의 말에 하나같이 동의한다는 듯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부부가 서로 동갑이라 그런지 친구처럼 네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서 반말을 하는데 처음에는 부부가 아닌 줄 알았다. 너무 친구 같은 말투라서 살짝 혼란이 오기도 했는데 치료받는 아이의 엄마, 아빠는 확실히 맞는 것 같다.
언제까지나 혼나는 학생처럼 다소곳이 듣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도 끝내는 한두 마디씩 대들기(?) 시작했다.
아주 부드러운 어조이긴 했지만.
"주말에는 좀 쉬기도 해야지 누워서 티브이 보기도 하면서..
지금 근력 더 만들어야 해서 운동 빼기는 힘든데.."
아내에게 별로 와닿지 않는 듯한 말이었지만 나름의 변명을 찾아 헤매는듯한 남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풉 웃고 말았다.
다른 집도 별반 다를 거 없구나 싶고.
아이가 생기면 아내는 남편에게 더 살림을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해 줄 것을 바라게 되는데 일에 지친 남편들은, 또 그다지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도와주는 집안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은 남자들은 보통 여자의 성에 찰만큼 살림과 육아를 함께해주지는 못하는가 보다.
더군다나 아이가 어디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라도 하면 육아 강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아내도 숨쉴틈을 찾게 되는데 우리처럼 발달이슈가 있는 자녀를 키우게 되면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린다.
정상발달의 자녀를 키우는 데에도 힘에 부칠 남편들인데 발달지연이나 여타의 문제를 갖고 있으면 더더욱 아이에게 크나큰 헌신과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보통은 엄마들이 짊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아빠라고 해서 아예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할 수는 없고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알아야 하고 더 공부해야 하고 그것도 안되면 아내가 시키는 대로 협조라도 해주어야 한다.
옆자리에 앉은 부부는 아내가 아이에 대해 모든 방면에서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안달이 나고 조바심이 나서 남편을 닦달하는 것 같았다. 핸드폰 그만 보고 애랑 좀 더 놀아주라고, 운동 포기하고 애한테 더 신경 쓰라고..
나만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옆자리 부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한 줌 위로가 된다.
또 한 가지 느낀 바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좀 자제해야겠다는 점이었다.
혹시 나도 남편에게 저런 모습으로 비칠까? 그 아내분의 말을 나도 같이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혼미해지는 느낌이랄까. 너무 밀어붙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엄마니까 내가 애에 대해서 너보다 더 잘 아니까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하니까 거부감이 들었다.
주양육자는 엄마가 맞으니까 엄마 말을 우선 따르는 게 나을지는 몰라도, 아빠도 아빠 나름대로 접근 방식이 있고 그게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는 영역도 있다. 비록 서투르고 부족한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아이에게 더 통할 수도 있고 진실된 마음은 와닿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발달장애에 관한 서적을 수십 권을 읽고 공부하면서 그리고 24시간 아이와 붙어있으면서 애에 관해서는 내가 무조건 맞다고, 내 말대로 따르라고 남편에게 너무 몰아붙인 것은 아닌가 나도 모르게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 있고, 짧은 시간이지만 남편이 아빠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름대로 있을 텐데 그건 덮어놓고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 아내와 남편 두 분 다 지쳤는지 이내 스마트폰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기실은 조용해졌다.
그분들 이야기 듣느라 읽고자 했던 책은 거의 못 보다시피 했지만 나름대로 책을 읽은 것보다 더 큰 깨달음 같은 걸 얻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 치료도 거의 끝날 시간이 되고 기왕에 못 읽은 책은 덮어두고 나도 멍 때리며 앉아 있었다.
SNS를 보는 중이었던지, 옆자리 아내분은 남편에게 한 마디 던진다.
"이 여자 진짜 이쁘게 생겼다. 몸매 좀 봐.. 이 여자 봐봐 예뻐 안 예뻐?"
(왠지 예쁘다고 대답하면 또 혼날 분위기인데..)
"에이.. 그게 뭐가 예뻐.. 별로야."
아 역시.. 그 남편분은 참 지혜로운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