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May 29. 2024

싸워야 하는 건 아이의 장애만이 아니다

느린 아이 엄마에게 필요한 의외의 역량

센터 수업 하나를 수강하는 데에도 오랜 고민이 뒤따른다. 어떨 때는 꽤 행동가인 것 같은 나 같은 사람도 자식 문제 앞에서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도 능력이다. 행동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고민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건 어느 영역에서나 통하는 진리다.


하지만 자녀 문제에 관한 한 상당한 고심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어디 가서 애를 낳아 키워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라는 역할은 처음이라, 특히 장애아이 엄마는 더욱 처음이라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보통은 애아빠인 남편과도 의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세계에 좀 살아보니까 말입니다..

이 세계란 발달장애나 여타 심리정서적 문제를 가진 애를 키우는 걸 뜻하는데, 웬만한 남편들은 상당히 아이 발달 문제에 관해 무심하거나 잘 모르거나 하는데, 그것도 아니면 아내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경제적 지원만이라도 두 말없이 해주면 다행이거니와 되려 아이의 상태를 부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센터에 다니는 아이 친구들은 정식으로 장애를 등록해서 특수교육을 받을 자격은 없으나, 그렇다고 정상 아이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생활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 경계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내 아이도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아이를 포함해 같이 센터 다니는 아이들을 관찰해 보아도 어쩔 때는 참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대체 왜 다니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직감으로 안다. 아빠보다는 아이의 또래 친구들을 볼 상황이 훨씬 많고, 아이의 주양육자이며, 기관 선생님과 직접 연락하는 것도 엄마이기에 뭔가 싸한 느낌, 내 아이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엄마가 예민하고 기민해서 그런 싸한 느낌을 받은 즉시 바로 병원에 데려가거나 센터라도 가본다면 아이 입장에서는 복 받은 거다. 만약 갔다가 아주 경미한 사안이라면 다행인 거고, 조금 심각하다면 하루라도 일찍 개입을 시작하는 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를 아내로 둔 남편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 또?)

남편이 아이의 상태를 강하게 부정하고 발달 치료며 센터며 병원이며 데리고 다니는 것조차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면 엄마는 그때부터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다. 남편이라도 아이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혹시 모르니 검사라도 받아보자,라고 나와주면 그나마 일련의 과정을 치르기가 한결 편해지는데 이상하게도 내 주변 남편들을 보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이의 상태가 경미할 때는 더 심하다.


아무리 발달상 어려움의 정도가 경미하다고 해도, 아이 스스로는 교육기관에 가야 하고, 보통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학습을 이어가기에 굉장히 버거울 수 있다. 그리고 거꾸로 생각하면 경미할수록 부모가 일찍 개입해서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나 훈련을 더해주면 어려움도 꽤 상쇄될 수 있다.


같은 센터 다니는 친구 아빠도 그런 경우였다. 내가 봐도 그 아이도 겉으로 봤을 때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데 엄마는 그 싸함을 느끼고 유치원 때부터 발 빠르게 치료를 시작했다. 지금은 모든 면에서 엄청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학교, 학원을 다 다니면서 주어진 일상을 소화내고 있으니 다 이른 개입 덕분이 아닐까.


그 엄마는 아이의 문제를 감지하자마자 직장을 포기하고 유치원 시간도 빼서 받을 수 있는 치료는 거의 다 받았다. 이게 말이 쉽지, 그런 행동력은 쉽게 발휘되지 않는다. 아이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도 지지부진하면서 고민만 하고 남편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좀 기다려봐라, 괜찮은 것 같다 하면 그냥 또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 분도 고백하기를 이 과정을 거쳐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남편과 시부모님을 설득하는 거였다고 한다. 남편은 아무리 봐도 애가 괜찮은 것 같은데, 별 큰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엄마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들어서 되려 애를 괴롭힌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시어머니도 처음에는 별 말 없었는데 센터 치료가 몇 년째 이어지고 경제적 부담까지 뒤따른다는 걸 안 뒤로 언제 그만둘 거냐고, 애 이제 괜찮아졌는데 그만 다녀도 되지 않냐는 말을 하루가 멀다 하고 한다고.


아이 병원 데리고 다니고 검사받고, 센터 치료 매번 데리고 다니는 일만 해도 굉장히 지치고 힘이 드는데 그 엄마는 남편과 시부모님도 늘 설득해야 하고 납득을 시켜야 하니 그게 더 힘들다고. 지금 아이 어려움에만 집중해도 모자란데 남편까지 소통이 안되고 커다란 벽처럼 또 다른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라고.


특히나 학년이 올라가니 발달상 어려움 그 자체보다는 심리적 불안정이 더 커져서 심리치료는 꼭 필요한데 가족들은 그걸 왜 계속 받아야 하냐고 반문하니 그럴 때마다 흔들리게 된다고.



내 남편도 그 집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무책임한 발언을 할 때가 있긴 하다.


"센터 치료 하나 더 추가한다고 애가 뭐 크게 달라지겠어?"

"이제 애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

"약 복용도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의사한테 한 번 말해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몹시 동요하게 된다. 정말 애가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괜한 일을 벌이고 있나 싶기도 하고, 정신과약을 너무 오래 먹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아이에게 하고 있는 치료에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소아정신과 전문의나 여타의 전문가들 의견을 들어보면 전혀 다르다.

병원에서 혹은 센터에서 치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애는 더 가르칠 게 없습니다라고 종결 선언을 할 때까지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몰라도) 계속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좀 좋아지는 것처럼 보여도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증상이 나이가 들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발생할 수도 있으니 청소년기까지는 치료를 받는 게 낫다.


경제적 부담도 무시할 수가 없다. 남자들은 더더욱 가성비나 효율성을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치료에 대한 회의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린 유아기이거나 한창 성장할 때가 아니면 치료의 효과가 눈에 보이는 영역은 아니기 때문에, 가끔은 더 퇴행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며, 속된 말로 무슨 돈지랄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치료를 끊지 않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는 SNS나 주변에 보면 성인기가 되어서도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불안증이나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기에 좀 더 나은 예후를 위해서라도 치료는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



남다른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참 여러 가지의 역량이 필요하다. 그중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역량 중 하나는 바로 남편을 설득하는 능력이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주지 시키고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치료 횟수는 가정 경제를 고려해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아이에게 꼭 필요한 만큼은 깊이 고민해 보고 결정해야 하고, 확실히 결정한 후에는 남편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애한테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 남편이라는 큰 산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정말 마음 둘 데가 없다.

아이 치료에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는 남편을 둔 엄마들이 참 부럽기도 하다.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오늘도 열심히 좋아하는 고기반찬 해주면서 남편을 구워삶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야구 없이는 못 살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