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 엄마에게 필요한 의외의 역량
같은 동네에서 하루에 많으면 서너 번까지도 마주치는 동네 엄마가 있다. 그 집 아이와 내 아이가 같은 학년이기도 하고 그 집은 다자녀인 탓에 엄마는 하루종일 등하교, 등하원 시키느라 늘 바빠 보인다. 단지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동네 빵집이나 마트, 학원 앞에서도 동선이 워낙 자주 겹치는 편이다.
그런데 그 엄마는 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뭔가 불편했다. 어쩔 때는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투명인간처럼 나를 무시하고 간단한 목례조차 하지 않는 적도 있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나도 처음에는 밝게 인사하다가 그런 모습에 질려서 나중에는 봐도 모른 척하기도 하고, 그 엄마가 애들 데리고 앞에 가고 있으면 괜히 다른 먼 길로 돌아서 가기도 했다.
아무튼 마주치면 뭔가 불편하고 부담 가는 느낌의 사람이라서 내가 피하고 말지 하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이런 인상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뭐 어차피 친해질 일도 없고 딱히 친해져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으니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런데 그 집 아이와 내 아이가 같은 반이 되었는데 최근에 부쩍 그 집 아이와 함께 하교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에는 애들끼리도 봐도 서로 소 닭 보듯 인사도 안 하는 사이였는데, 확실히 같은 반이 되니 어떤 소통이 좀 있었는지 몰라도 함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또래관계의 어려움으로 등교거부가 이어지고 있는 마당에, 거기다 반에서 친하게 지내고픈 친구를 찾지 못해서 불안정한 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집 아이도 좀 차분하고 저학년 답지 않게 점잖은 성향으로 보이고 듣자 하니 책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하니 내 아이랑 성향이 좀 맞을 것 같았다. 같은 반에 마음 기댈 친구 한 명 생기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란 말인가.
그 엄마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집 아이가 아이랑 친해진다면 집도 가깝겠다 여러모로 좋을 일이었다. 하루는 그 친구와 같이 하교를 하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집에 놀러 가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학원 가기 전 30분 정도 집에서 같이 놀았는데 그 친구는 정말 까불지도 않고 예의 바르고 점잖아서 약간 애어른 느낌이 났다. 아이들끼리 앉아서 보드게임을 하고 노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아이도 즐거워하면서 노는 모습에 그간의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신바람이 나서 간식도 준비해서 먹이고 그 친구에게 집도 가까우니까 자주 놀러 오라고 일렀다.
다음 날 또 그 엄마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전에는 간단한 목례만 하거나 아니면 봐도 아예 모른 척하고 지나가던 게 일상이었는데 나는 마음을 다르게 먹었다. 미친 자가 한 번 되어보자..
"어머, 우리 동민이 진짜 예의 바르고 차분하고 애가 정말 착하더라고요. 우리 집에서 잠깐 놀았는데 말도 잘 듣고 너무 예뻤어요. 언제든지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된다고 해주세요. 우리 애가 동민이 착해서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가까우니까 자주 오며 가며 놀게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없는 사회성을 내 바닥 깊은 곳에서까지 긁어모아 십분 발휘했다.
나의 근본 없는 들이댐에 그 엄마도 처음에는 약간 당황한 듯싶었으나 자식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 이내 밝은 미소를 보여주며 그랬군요 알겠다고 했고 다른 엄마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사실 그 엄마가 웃는 얼굴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늘 무뚝뚝한 표정이었는데 웃기도 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내 성격도 그다지 외향적이지 않고 낯가림도 심한 편이고 일단 친해지면 편해지지만 그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다.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지는 않지만 아이 키우면서 집에 있다 보니 동네엄마들 만나서 수다 떠는 시간보다 집에서 조용히 책 읽을 읽는 게 더 내 에너지를 충전해 준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친다고 해야 하나.
더군다나 나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는 건 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인데 그 엄마에게 친한 척하는 내 모습은 나조차도 낯선 것이다.
나도 참 자식을 위해서 별 일 다하는구나 싶고.
아이에게 그날부터 주입했다. 학교에서 친구 없다고 속상해했는데 주된 이유는 외향적이고 활달한 인싸 남자아이들 무리에 끼지 못해서 인 것 같았다. 좋게 말해 외향적이지 그 친구들은 상당히 까불고 말썽도 심심치 않게 피우는 아이들이라서 내 아이가 그 분위기에 끼기에는 한창 역부족이다. 눈치도 봐가면서 장난도 치고 비속어도 적재적소에 섞어가며 노는 그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다.
아이도 이제 포기했는지 쉬는 시간에 그냥 그 친구들 노는 거 지켜보는 정도로 만족한 것 같다. 동민이는 완전히 외향적이지는 않지만 놀 때는 또 잘 노는 것 같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고 잘만하면 아이랑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설프게 잘 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느니 자기랑 성향 맞는 친구 하나 얻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이란 말인가.
그 친구와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다. 어제는 그 친구 형제까지 다 불러서 집에서 놀게 했는데 다 보내고 나서 청소하느라 혼이 났다. 그래도 애를 위해서라면, 애가 웃으면서 놀 수만 있다면.. 사회성 느린 아이들은 성향 맞는 친구 집에 불러서 노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그 도도한 동네엄마에게 추근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시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