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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17. 2024

요즘 너, 낯설어

느린 아이도 잘할 수 있어요

드디어 그간의 내 노력이 소기의 결실을 맺는 건가.

요즘 내 아이의 아침 일상은 참으로 낯설다. 어쩌다가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는지 나조차도 궁금해질 지경이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아침 루틴을 적극적으로 실천 중이다.

중요한 건 강요한 적도 없고 억지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한다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괜스레 'ADHD 있는 아이도 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엄마가 노력하니까 이렇게 달라지잖아요!'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느린 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이제 한시름 좀 놓은 건가 싶을 때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아이는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도 또 여지없이 다시 퇴행하기도 하고, 멈춰있기도 하고, 여지없이 절망을 안겨주기 때문에. 함부로 아이가 좋아졌다,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다가도 그 순간의 나를 삼엄하게 경계한다. '아니야, 이러다가 또 문제행동이 나오겠지, 걱정할 일이 생기겠지'하는 마음.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날 읽었던 책을 한 두권 가져와서 독서 기록 사이트에 책 제목과 저자 및 느낀 점을 쓰고 저장한다. 언어치료 대신 책육아로 그 빈틈을 메꾸려는 나의 노력이 무색해질 만큼 아이는 그다지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도서관에도 내가 가자고 하니 억지로 따라가는 모양새였고, 가서도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법이 없었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관심 가는 만화책이나 특이한 책 제목들을 살펴보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데리고 다녀도 도통 책 읽기 습관이 안 잡히니 좌절스러웠고, 육아서나 유튜브에 나오는 아이와 내 아이는 정말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반강제로 하루에 30분은 책 읽기를 시키기 시작했는데, 자발성이 없는 책 읽기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는 했다. 유명한 자녀교육서에서 보면 흥미로운 책을 거실이나 식탁에 두기만 하면, 그렇게 환경 조성만 해주면 아이가 스스로 찾아서 읽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 꼴을 보려고 기다리기에는 세상에 스마트기기만큼 재미난 게 너무나 많아서 책은 제목만 흘끔 볼뿐, 학습만화 이외에는 먼저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책 읽기를 하루 루틴으로 넣었다. 대신 영어, 수학 같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공부학원은 일체 보내지 않고 하루에 예체능 학원 한 두 개 가는 정도로 사교육 다이어트를 했다. 독서를 습관으로 삼고 싶으면 이것저것 헛짓을 하다가 책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아이에게 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어도 수학도 아니요, 무조건 언어발달, 모국어 습득이 우선이었기에 책에서 말한 대로 최대한 비스꼬롬하게 실천해보려고 했다.


2년 이상을 노력했지만 여전히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상 루틴 중 하나로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최근에 아주 조금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다독상을 받으려면 독서기록 사이트에 꾸준히 읽은 책을 기록해야 하는데, 그 상을 받기 위해서 기록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그렇게 하라고 수백 번 말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올해에는 웬일인지 갑작스레 동기가 생겨서 기록을 시작했다.



그것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을 가져와서 사이트에 들어가 타이핑을 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차암 낯설다. 너 내 아들 맞니?



이전에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영어 학원은 보낼 생각도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아서 반강제로 엄마표 영어를 하고 있다. 엄마표 영어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좌절했다. 나는 도저히 저렇게까지는 못하겠다는 거부감만 들었다. 전공자인 나도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데 영어와 담을 쌓고 살았던 엄마들이 엄마표를 하라고 하면 힘들긴 하겠다는 공감도 들었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아니 학년이 오를수록 두세 시간을 오로지 영어 소리 노출과 영어 책 읽기에 집중을 해야 눈에 띄는 향상을 볼 수 있고, AR지수가 높은 영어책을 읽어내기만 한다면 수능 만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했다. 나도 장단 좀 맞춰보겠다고 영어책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해두고 틈만 나면 들어가서 이 책 저 책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수십만 원어치를 결제해서 구매했다.


하지만 더욱 좌절스러운 것은 그렇게 흥미를 끌만한 영어 그림책을 사놔도 10권 중에 아이가 즐겨보는 건 많아 두세 권이었다. 나머지는 아무리 들이밀어도 재미없어했다. 책육아에서 최악이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보게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무리 비싼 원서책이라도 아이가 흥미가 없어하면 들이대면 안 되다는 사실이다. 그 유명한 ORT도 통째로 사서 보여줬는데 3,4단계까지 재미있게 보다가 그마저도 어느 순간 그만뒀다.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탓도 있다.


지금 한글책도 제대로 못 읽는데 무슨 영어책이냐 싶어서, 흘려듣기니 집중듣기니 하는 정석대로의 엄마표 영어는 진작에 내려놨다. 다 귀찮아져서 그냥 영어 동화 애니메이션 사이트를 1년 치 결제해 놓고 틈나는 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기로 했다. 하루에 20분만이라도 보는 게 목표였다. 초3이라 이미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아예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학교 교과서 수준만큼은 따라가자,를 목표로 삼았다.


처음 한 두 달 동안은 그마저도 재미없어하고 영어동화사이트에도 흥미를 못 붙였다. 그런데 최근에 사이트에서 하는 동기부여시스템을 알게 되더니 그 후로 열심히 임하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타보면 마스터 배지를 준다든가, 학교 상장이랑 아주 똑같은 형태로 상장 수여 같은 걸 해주니까 아이는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했다. 속으로 나는 저런 식의 동기부여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이는 굉장히 목매달았다.


그 후로 아침에 일어나면 독서 기록을 하고 나서 영어 영상을 보거나 문장 따라 읽기를 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이런 걸 하라고 시킨 적은 전혀 없다. 학교 다녀와서, 혹은 저녁에 남는 시간에 루틴으로 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게 할 생각도 없었고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저 밥 잘 먹고 약 챙겨 먹고 등교만 무사히 해주기만 해도 대단한 일 아닌가. 등교거부를 겪고 있어서 더더욱 아무 탈 없이 등교한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ADHD 특성상 주의집중력이 낮은 아이들은 무언가에 쉽게 질려하고 금방 흥미를 잃는 경우가 많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과 책 속에서 본 내용들을 몸소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접하게 되었을 때, 많이 절망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하면 열심히 다니던 태권도도 컴퓨터 교실도 바이올린도 다 일 년이 채 안돼서 때려치웠다. 너무 하기 싫다고 울며 불며 사정하는 애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하나를 시작하면 정말 '그릿'있게 최소한 2년 이상은 해야 한다는 게 내 신조인데 ADHD 아이에게 그건 형벌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다양하게 이것저것 경험해 본다는 데에는 약간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글쎄 그 정도로 얕기만 한 다양한 경험이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꽂혀있는 독서와 영어라는 아침 루틴도 언제 흥미를 잃을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아이는 잘하고 있네, 이 정도만 꾸준히 하면 좋을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다시 되돌이표를 찍은 적이 많으므로. 이런 칭찬의 글을 쓰는 것도 사실 무섭다.


잠시동안이라 할지라도 이상적인 아침 루틴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아이의 현재 모습은 마구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자랑도 하고 싶다. 내가 아이에 대해 쓰는 글들은 거의 다 걱정과 문제행동 위주라서 정말 긍정적인 글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든데 그래도 아주 가끔은 이렇게 희망의 글을 쓰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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