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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04. 2024

직접 겪어봐야 알지

느린 아이 엄마에게 필요한 의외의 역량

아이가 야구에 꽂혀서 매일 프로야구 일정을 챙겨보고, 직접 글러브와 배트를 가지고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운동도 하고 있다. 야구에 꽂히는 건 꼭 내 아들뿐만이 아니어도 여느 평범한 초등학생이라면 한 번쯤 거쳐 지나가는 열병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이는 리틀야구단에 입단하고 싶다고 했다. 직접 야구를 배우러 다니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대근육, 소근육 발달도 느리고 운동신경 자체도 또래보다 느려서 감각통합 수업까지 받던 녀석이다. 각종 치료와 각고의 노력으로 최근에 들어서는 또래 남자아이들 중에 운동신경 좀 없는 아이들 수준까지는 그럭저럭 올라온 편이다.


축구 교실도 처음에 가기 싫다고 울고 불고 난리 치던 녀석이, 자진해서 먼저 야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나중에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니 헛웃음만 나왔다.


바이올린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서 때려치운지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ADHD 특유의 성향이 시작할 때는 엄청 몰입하면서 재미있게 빠져드는 게 금방 흥미를 잃고 시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인데 아이는 몸소 그러한 성향을 매번 ADHD를 입증하듯 보여주고 있다. 뭐든 시작은 좋은데 금방 그만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태권도도, 컴퓨터도, 코딩도, 바이올린도.. 다양한 영역에서 잠깐 배웠다가 맛만 보고 때려치우는 중이다.


뭘 하나를 시작하면 최소한 2년 정도는 진득하게 배웠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인데 매번 이런 식이니 그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아이의 요구와 흥미에 맞춰서 알아봐 주고 그에 맞는 학원이나 사교육을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고 데리러 오고 하는 일도 보통 쉬운 게 아니다. 그나마 애가 하나이기에 망정이지..


이번에는 야구에 꽂혀서 야구단에 들고 싶다고 하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분명히 좀 배우다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그만둔다고 할게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굳이 또 그렇게 쉽게 때려치울 거면 뭐 하러 시작을 할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리틀야구단을 알아봐 달라며 성화였다. 직접 검색창에 들어가 가까운 야구교실을 검색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며칠 시달리다가 지친 나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멀지 않은 곳에 리틀야구단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체험 수업을 신청했다. 야구는 축구와 달라서 배우기에 상당히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릴 거라서 애가 힘들어할 거라는 남편의 경고에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니까, 애가 이 난리니까 직접 경험해 보라고 해야지. 자기가 스스로 해보면 알겠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못할지.."


아이는 야구단 체험 수업을 신청해 놨다고 하니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그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얘가 정말 야구선수라도 되려고 이러는 건지 나도 의심반 기대반으로 함께 기다렸다.


코치님과 통화를 하니 야구 훈련은 한 번에 세 시간 연속한다고 했다. 그것도 야외에서.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실내 연습장에서 하기도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야외 운동장에서 세 시간 내내 하는 것이다.

땡볕에서 애가 세 시간을 해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야구단 훈련장에 가니 정말로 야구에 꽂힌 대한의 어린이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들 프로야구 선수와 똑같은 폼의 야구복과 장갑, 모자, 그 외 장비를 갖춰 입고 훈련에 임했다. 야구복을 입지 않은 내 아이만 눈에 띄었다. 이전부터 다니던 아이들은 폼도 남다르고 개개인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정말 야구를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훈련도 재미있게 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야외에서 세 시간을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부모님들은 미리 알고 접이식 의자며 양산이며 준비해 와서 대기했는데, 그런 준비물도 없었던 나는 땡볕에서 모자 하나에 의지하면서 눈부심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첫 체험 수업인데 애만 놔두고 어디 다른데 가 있을 수도 없었다. 훈련과 경기는 나름 재미있어 보였다. 실수는 있었지만 초등 저학년 수준에 맞게 공도 살살 던져주다 보니 아닌 나름 안타도 쳐보고 득점도 시키면서 재미를 느끼는 듯했다.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세 시간이 금세 흐르고 체험 수업은 끝이 났다. 만약 야구단에 입단한다고 하면 매번 이렇게 아이를 따라와서 세 시간씩 대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만 맡기고 집에 가는 부모님들도 있겠지만 보니까 저학년 부모들은 대부분 기다려주면서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만약에 애가 입단하고 싶어 하면 어쩌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자식 운동 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훈련이 끝나고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입단하고 싶어? 어땠어? 재미있었어? 원하면 등록하고 가자!"


"...."


야구단 가고 싶다고 징징대던 모습과는 다르게 별 반응이 없다. 대답이 없이 조용하길래 조금 시간을 두고 나중에 물어보았다.


한참 후에 아이는 재미는 있긴 했지만 힘들어서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세 시간을 야외 훈련받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 힘든 상황을 견뎌내는 아이들은 그만큼 야구를 순수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해내는 것이다. 한 번의 경험으로 아이 스스로 깨달은듯했다. 힘들어서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을.


아이의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뭣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재미있다면서 계속하고 싶다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여기를 데리고 다닐지 생각만 해도 괴로워졌다.


대신 야구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빠랑 배트, 글러브 가지고 나가서 동네에서만 하자고 두 손 모아 약속을 해주었다.


직접 경험시켜 보니까 이렇게 빠르고 확실하게 단념시킬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체험 수업 안 해줬으면 언제까지고 계속 야구단 타령이었을 텐데 조기에 막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도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하면 좀 힘들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맛보기 교육을 시켜줄 셈이다. 아예 안 해보면 자꾸 그것에 대해서 꿈꾸게 되고 나중에 엄마 때문에 못했다는 소리 안 듣기 위해서라도 미리 경험을 시켜줘야 하겠다.


그래도 ADHD 성향 덕분에 몰랐던 세계도 알게 되고 하나씩 간접적으로 맛보기식 경험도 하게 되니 뭐,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 가지를 깊이 있게 그리고 끈기 있게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뭐 억지로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마음을 가볍게 먹고 어느 정도 놓을 줄 아는 덕목 또한 필요하다는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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