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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l 31. 2024

때로 거짓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

거짓에 대한 새로운 시각

방학을 맞아 조카를 집에 초대해서 데리고 있었다.

힘들다.

무지 힘들다.

내 자식이 아니니까 함부로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그냥저냥 모든 행동을 다 받아주면서 눈감아주고 데리고 다니려니까 은근히 스트레스받는다.


가족들이 다 같이 만날 때는 잘 몰랐던 조카의 또 다른 성격의 이면을 보게 되었다. 우리 집에 며칠 데리고 있지 않으면 굳이 몰라도 됐을 부분까지 알게 되니까 당황스럽다.


나는 아무래도 남의 자식은 데려다가 키울만한 위인은 못 되는 것 같다. 계모라는 말의 뉘앙스가 왜 부정적인지 알 것 같다. 내 자식에게는 쉽게 되는 훈육 한 마디도 한 다리 건넌 친척 사이가 되니 함부로 말을 못 하겠다. 특히 시부모님에게 한없이 귀한 첫 손자'님'이라서 그런가 더 부담이 간다.



참 뜬금없게도 <명상 살인>이라는 범죄스릴러 소설을 읽다가 지금의 내 감정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만났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거짓은 양심에 부담을 준다.
진실은 자유를 준다. 이것이 보편적 생각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진실이 거짓보다 다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진실은 거짓보다 상처가 될 수 있다. 어떤 진실은 아무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이 보호한다.

<명상 살인, 카르스텐 두세>



현 상태에서 진실이란, 조카들과 내 아이를 데리고 있기가 너무너무 힘들다는 사실이다. 날은 덥고 짜증은 나는데 최대한 친절한 숙모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게 내 임무다. 시부모님은 실시간으로 손주들이 어떻게 잘 놀고 있는지 사진과 동영상을 받아보기를 원하신다. 최대한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촬영해서 계속 보내드려야 한다. 그런데 무덥고 땀이 나는 날씨다 보니 사진 속 아이들 중 한 명은 꼭 인상을 쓰거나 무표정인 경우가 발생한다. 시부모님은 그 표정에 대해서 묻는다. 처음엔 일일이 대응하다가 나중에 답도 안 해버렸다.



"조카들까지 데려다가 돌보니까 힘들지? 네가 고생이다."라는 말에 나는 극구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아니에요, 애들 같이 있으니까 잘 놀고 즐거워하니까 좋아요'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 중이다.

복장 터지는 건 누가 멱살 잡고 나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호의라는 데에 있다. 내가 저질렀으니 내가 책임지고 끝까지 즐거운 사촌들과의 만남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가족들에게 전혀 힘들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남편은 무슨 죄로 내 거짓말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거침없이 쏟아지는 진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내가 더운데 하루종일 애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 줄 아느냐고, 퇴근한 남편에게 온몸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가 나도 우습고 유치하지만 그것마저 안 하면 이 고생을 못 견디겠다.


그래도 거짓으로 시부모님과 여타 다른 가족들은 보호받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인생에 거짓은 꼭 필요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적절한 거짓말은 구사할 수 있어야 사람 노릇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내게 공허한 외침이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거짓 한 마디 하지 않고 정직하기만 하면 직장은 물론 가족사이에서조차 사람 대접 못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언어발달지연 진단 경력이 있는 내 아이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데에 있으니, 이것 또한 복장 터질 노릇이다. 나이치고 너무 순진하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고 남을 속이는데 영 소질이 없으니 이거 큰 일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선한 거짓말을 일부로라도 꼭 연습시켜야겠다는 교훈을 새삼 얻는다. 얼른 이 고난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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