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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ug 06. 2024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나도 모르겠는데

몇 년 전 친구들과 만났을 때 일이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갑자기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근데,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놀린다거나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는 말투였다. 친한 친구라고 말했지만 사실 예전에 함께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매일같이 붙어 다녔으니 그때는 정말 친했고, 지금은 그때만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한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환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일 년에 몇 번은 어렵게 시간 내서 만나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떻게 지내는지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수다 떠는 것만으로도 많이 힐링이 된다. 더군다나 이 친구들은 나를 내 가족과 한 덩어리로 보지 않고, 어렸을 때 학교 다닐 적 오롯이 나로서만 존재할 때, 불완전하고 서툴지만 즐거웠고 재밌었던 내 모습을 기억해 주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 모임의 친구들은 다들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고 실제로 자주 다닌다.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에 다니는 것이다. 어설프게 가까운 동남아나 아시아는 밥먹듯이 다녀봤고 코로나가 끝난 지금은 주로 유럽이나 북미 쪽으로 장기 여행을 즐겨 간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여행이라는 큰 이벤트가 그 친구들에게는 삶의 낙이고 주된 에너지원인데, 느린 아이를 키우느라 일도 못하고 별다른 특별한 일 없이 사는 내 모습이 측은하고 답답해 보였는지, 약간은 걱정되는듯한 말투로 물어보는 친구의 표정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다.


나도 진심으로 궁금했다. 내가 무슨 재미로 사는지.

어디 여행도 못 가고 매일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 속에서 무엇에서 즐거움 느끼고 살아갈 힘을 얻는지, 나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숙였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려고 애썼다. 다행히 친구들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내 삶이 그렇게 불쌍해 보였을까.


남편 일 특성상 그렇게 나가기도 힘들고, 더군다나 아이도 편하게 해외를 데리고 다닐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굳이 여행을 가고 싶다면 나 혼자서 데리고 다닐 수도 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젊을 때는 틈만 나면 여행 계획을 세우고 해외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다닐 정도로 여행 자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남편 없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여행은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가 일이 년 더 크고 나면 꿈꿔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내 돈 쓰고 고생만 하다 온다고 보면 된다.


아직 아이가 없는 친구와 아이가 있어도 남편이 함께 장기 여행을 갈 수 있는 직업인 친구가 유독 많아서 만나면 주된 화제는 거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게 이 친구들은 부동산도 재테크도 딱히 관심이 없고 오로지 여행이 가장 큰 관심사다. 그래서 현재의 나랑은 별로 통하는 게 없다.


아이 빼고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는 야구인데, 그마저도 이 친구들은 아예 관심이 없으니 더 답답했다. 은근슬쩍 야구 얘기를 꺼내봤지만 이야기는 자꾸 끊어지고 다시 여행에 관한 주제로 흘러간다.


그나마 직업이 비슷하고 과거에 공유하는 추억과 공통분모로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수다의 재미는 있었지만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전에는 참 친했던 친구들인데 사는 모양새가 달라지니 이렇게 관심사도 달라지나 싶기도 하고, 특히 내가 제일 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괜히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다.


나중에 비슷한 또래를 키우며 대기업 다니느라 바쁜 남편 덕에 애들 데리고 해외여행은 꿈꾸기 어렵고, 나처럼 프로야구에 푹 빠진 친구를 만났을 때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인 느낌이 들었다. 웃긴 건 이 친구도 예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지만 그때는 서로 수업만 같이 들을 뿐 전혀 공감대도 없고 같이 다니지도 않아서 인사만 겨우 하던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사는 환경이 엇비슷해지다 보니 지금은 만나면 그 누구보다 마음이 편하고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도 달라진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보다. 어렸을 때 말로만 듣던 이야기가 살면서 직접 경험하게 되니 더 확실히 와닿는다. 지금 이 친구와도 이렇게 죽이 잘 맞고 만나면 편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상황이 또 달라질 수도 있고 그땐 또 다른 사람과 마음 터놓고 지낼지도 모를 일이다.


만나면 맨날 여행 이야기만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나는 시간 자체는 소중하고 나도 모르게 힐링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나도 그 친구들처럼 해외에서 한달살이도 하고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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