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Dec 12. 2022

너무너무 예쁘다고 해도

너를 떠올리며 거절했지만

일요일은 항상 그렇듯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남편과 나는 개인적인 생활을 가져본 적이 없다.


친정, 시댁이 다 멀고 주말에 따로 아이를 봐주거나 잠깐이라도 맡아줄 만한 친척도 가까이 살지 않기에 주말 육아는 남편과 나 둘만의 몫이다. 평상시에는 99퍼센트가 내 몫이지만.


가끔 주변의 지인들이 주말에 시댁이나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영화를 보거나 술 한잔 마시러 가는 등 부부만의 데이트 시간을 가졌다는 말을 들으면 부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다른 나라 이야기라 포기한 지 오래다.

남편도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만큼은 취미생활을 하거나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주말에 더 이상 엄마, 아빠를 찾지 않는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 일요일도 여느 때처럼 아이를 데리고 셋이 외출했다. 만화책에서 본 마술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몇 번 이야기하길래 미리 예약해둔 마술쇼를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이건 솔리드 오빠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근데 천생연분이 아니네?


귀에 익은 이 노래는 솔리드의 또 다른 곡 <나만의 친구>였다.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라 제목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노래 자체는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어렸을 때 즐겨들었나보다. 옆에서 떠드는 아이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나도 모르게 솔리드 노래에만 집중했다.


<나만의 친구>를 들으면 든 생각은, 솔리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들어도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노래를 만들어낸 걸까? 하는 것이다. 물론 90년대 특유의 느낌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막귀인 나에게는 그저 세련되게만 들린다. 가사도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입에 쩍쩍 달라붙는지.


솔리드의 광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테이프를 사서 즐겨듣긴 했다. 특히 <천생연분>은 명불허전, 나에게 최고의 노래 중 하나다. 어쩌다가 술 한잔 마시고 노래방에 가게 되면 나는 노래곡집에서 열심히 이 천생연분을 찾아 불러댔다. 지독한 음치지만 천생연분만큼은 완벽하게 가사를 숙지하고, 내 노래처럼 술기운에 더 용기가 더해져 열심히 부르곤 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사실 <천생연분>의 가사 내용은 참으로 비극이다.

여자 친구가 있는 신분임에도 "너무너무 예쁘다는 다른 여자"를 소개 한 번 받고 싶어서 설렘을 가득 안고 잔뜩 꾸민 뒤에 "새로운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남자가 가사의 주인공이다. 소개팅 자리에 먼저 나가서 예쁜 여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상상하는 남자의 속마음도 묘사되는데, 만약 진짜로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온다면 어쩐단 말인지. 현재 여자 친구는 차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겠다는 건지, 아니면 여자 친구도 만나고 새로운 여자도 만나는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이 가사의 화자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친숙하고도 짜릿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수줍게 고개를 들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내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너"였던 것이다.

다른 예쁜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남자의 마음만큼이나 여자도 새로운 남자와 소개팅을 몰래 시도해본 것이다. 이후 가사는 서로 황당함에 맘껏 웃고 쿨하게 서로 용서하고, 예쁜 추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자며 끝이 난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 노래 가사가 한토 시도 빠짐없이 모두 마음에 든다. 작사가는 어떻게 이렇게 발칙하고 깜찍한 한 눈 파는 커플 이야기를 재미있게 가사로 풀어냈을까. 내가 나이가 먹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노래는 아무리 인기곡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가사가 마음속에 와닿지가 않는다. (잔나비 빼고)


사실 <천생연분>이 노래가 나왔던 시기는 내가 소개팅을 할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겨우 초등학교 3, 4학년이었다. 이 때는 주말 저녁이면 티브이 앞에 앉아 가요톱텐 같은 가요 프로그램을 한 시간 동안 앉아서 지켜보는 게 주된 일상이었다.


솔리드는 얼굴이 꽃미남처럼 잘생긴 외모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들만의 개성과 느낌이 강한 그룹이었고 무대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통 큰 정장 바지에 중절모자를 쓰고, 메인 보컬 김조한은 특이한 모양의 턱수염을 하고, 래퍼 한 명은 지팡이 같은 걸 꼭 들고 나왔다. 김조한은 미국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왠지 가사 속에서 묻어나는 버터향의 영어 발음과 우리말이 절묘하게 섞인 창법이 인상 깊었다. 솔리드를 유난히 좋아했던 친오빠는 방에 틀혀 박혀 <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노래를 무한 반복 재생하면서 열창하곤 했다. 나는 저 우울한 노래를 왜 저리도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그 당시 20대들에게는 굉장한 인기였던 것 같다. 솔리드는 아마 90년대에 20대들에게 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때 당시 <천생연분>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얼른 어른이 돼서 저런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로망을 품었을까. 대학생이 돼서 남자 친구도 사귀고, 소개팅도 해보고 그런 눈부신 20댕의 캠퍼스 생활을 꿈꾸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너무너무 예쁘다고 해도
너를 떠올리며 거절했지만
이번 한번뿐이라는 걸 맹세해
약속을 정하고 그 날이 왔어
신경써서 옷도 입고 머리도 하고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에서 무슨말을 할까 고민도 하고
널 만날때완 다른느낌에 설레임을 안고 집을 나섰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거야
나를 믿고있는 너에겐 정말 미안한 마음 뿐이야
이번 한번만 용서해
십분정도 먼저 도착해서
어떤여자일까 상상을 했어
예뻤으면 키도 컸으면 좋겠어..

<솔리드, 천생연분>


내가 이렇게 90년대 노래를 반복 재생하면서 무한 찬양을 하면 남편은 나에게 한 물간 세대 취급하며 놀린다. 자기는 그래도 최신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이라고 하는데, 나의 멜론 플레이리스트는 어지간하면 90년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을 보냈던 90년대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IMF 전에는 경제 성장 기였던 만큼 모두가 웬만큼 잘 벌고 잘 살았던 시대라고들 묘사하지만 우리 집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평범함에 더 못 미치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자라는 어린 시절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그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와 가수들이 그립고 그 문화를 추억하며 향수에 젖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시 그 시기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젊고 화려하게 빛났던 솔리드 오빠들을 보면서, 나만의 선분홍빛 미래를 꿈꾸며 상상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단순한 일상을 살았고, 삶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알고 싶은 의지도 없었던 그저 어린아이였다. 따로 문화라는 걸 배우고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티브이에서 보여주는 대중문화를 통해 나도 언젠가 저런 멋진 어른이 될 거라고 선망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90년대에 다른 멋지고 대단한 가수들도 참 많지만, 솔리드의 <천생연분>은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고 웃음 짓게 만드는 노래라서 일부러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지는 않지만, 어디서든 우연히 듣게 될 때마다 반가움에 몸서리치게 된다. 뼛속깊이 참으로 나는 90년대 사람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민정이 부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