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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Dec 16. 2022

둘째 손자가 갖는 한계

시댁 이야기

며칠 전 시부모님께서 백화점에 갔다가 우리 집에 잠깐 들르신다고 했다. 


곧 크리스마스라서 선물 대신 손주 용돈도 주시고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시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시니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오전에 평소보다 청소에 좀 더 공을 들였다. 잠깐 있다 가더라도 어머님은 집안 살림 상태를 금방 스캔하실 수 있기 때문에, 살림 잘한다는 소리는 기대도 안 하지만 최소한 더럽게 하고 산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대충 정리를 했다.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서 오셨는데 요즘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딸기를 하나 사 오셨다. 가격표를 보니 거의 3만 원에 육박했다. 

나는 "이렇게 비싼 딸기를 사 오셨어요. 씨알도 굵고 너무 탱글탱글하고 맛있겠다. 애가 딸기 정말 좋아해요. 잘 먹을게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으로 감사함의 마음을 전했다. 

아들 집에 오는데 손주 용돈도 주시고 과일까지 손수 사 와주시는 마음이 정말 고마웠고, 늘 그렇듯 시댁에는 고마움의 마음을 두 배로 더 많이 표현하려고 애쓴다. 


오랜만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지만 왠지 아이는 친가보다는 외가 쪽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크게 반가워하지는 않았다.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해봐야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탓도 있고 아이의 화용 언어가 아직 서투르기 때문에 자기 학교 이야기라던지, 친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지도 못한다. 그래도 옆에서 계속 부추겨서 시부모님과 아이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과일과 차를 내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부모님께 백화점 가셔서 쇼핑 많이 하셨냐고 물었다. 아버님 잠옷과 겨울 모자, 부엌용품 등 잡다하게 필요한 것들 샀다고 말씀하시더니, 큰 손주가 이제 4학년 올라가는데 그전에 들던 가방이 너무 유치하고 작아져서 새 책가방이 필요하다기에 하나 사고, 큰 손주 집에서 잘 때 덮을 겨울용 이불도 샀다고 하신다. 


"우리 OO이 엄마, 아빠가 통 그런데 돈을 안 쓰고 워낙 아끼며 살잖아. 그래서 애가 몇 년이나 된 따뜻하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자길래 불쌍해서 좋은 걸로 하나 샀다. 1학년 때부터 쓰던 가방도 작아져서 새 가방 갖고 싶은 브랜드 말해주길래 거기 가서 하나 사고." 

여기서 큰 손주네 엄마, 아빠는 시부모님의 큰 아들, 우리 남편의 친형을 말한다. 


나는 "네, 잘하셨네요."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손수 사다주신 씨알 굵은 딸기가 초라해 보인다. 크리스마스라고 둘째 손주인 아이에게 용돈도 주시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마음 한편에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늘 이런 식이다. 시부모님에게는 큰 손주가 일 순위고 우선이다. 

둘째 손주인 내 아이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항상 손주들 똑같이 예쁘다고 말씀하시지만, 정말 말만 그렇게 하시는 느낌이 다분하다. 물질적인 제공은 둘째치고 어머님, 아버님이 평소 하시는 말, 행동, 큰 손주를 대하는 모습, 바라보는 눈빛에서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은데 나와 내 남편 눈에는 그대로 느껴진다. 어머님, 아버님께는 큰 손주가 언제나 첫 번째고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 


남편도 별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 한 번 언급하긴 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너무 큰 손주만 예뻐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우리 OO 이는 엄마, 아빠가 두 배 세 배로 더 많이 사랑해주면 되니까." 


남편도 집안에서 둘째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설움이 느껴질 때가 한 번씩 있었다고 했다. 우리 시부모님인 남편의 엄마, 아빠는 차별하지 않고 거의 형이랑 평등하게 대해주고 잘해준 것 같은데, 친할머니는 오로지 집안의 장손인 큰 손주만 대놓고 예뻐하고 둘째 손주는 거의 안중에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둘째 손주가 더 공부 잘하고 똑똑하면 안 되는데, 쟤가 지네 형 기죽이면 어떡하냐고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남편의 친할머님은 전형적인 옛날 분이셔서 그랬던 것 같지만, 그래도 남편은 친할머니가 보여주는 아무 절제 없는 날 것의 편애가 상처까지는 아니었어도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나와 남편의 공통점은 둘 다 집안의 둘째라는 사실이다. 차이점이라면 남편은 성별이 같은 아들이고, 나는 오빠가 있어서 성별이 다르다. 오빠와 성별이 다른 딸이어서 그런지 나의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셨다. 그분들도 아들이 더 귀하게 대접받던 시대에 나고 자란 옛날 분들이지만 어쩐지 오빠보다 나를 더 예뻐한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오빠는 외갓집인 부산에서 태어나 몇 년간 자랐고 나는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댁에 함께 사는 와중에 태어났다. 집에서 함께 살면서 태어난 손주였던 탓인지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사랑해주신다, 고 느낀 적은 별로 없는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많이 사랑받은 것 같다. 그래서 어렸을 적 그분들께 사랑받았던 것이 내가 지금 인생을 살 때 힘이 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더 잘해드리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도 크다. 


친정엄마, 아빠도 오빠는 아들이라서, 나는 딸이라서 비슷하게 사랑해준 것 같아서 딱히 차별받았다는 느낌은 없다. 그런데 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두 살 차이 나는 같은 성별의 시댁 조카와 끊임없이 비교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내 아이는 언어발달에 문제까지 있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 손주처럼 재미있게 대화를 한다던지, 말장난을 한다던가 하는 게 없어서 자연스러운 소통이 어렵다 보니 더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어머님께 아이가 감기 걸려서 아프다든지, 어떤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한다던지, 떼를 써서 힘들게 했다던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 어머님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무조건 큰 손주네 이야기다. 


"우리 OO이도 그 나이 때 그랬어. 근데 지금은 나아졌어. 

우리 OO이도 이번에 감기 걸려서 무지 아팠어. 요새 감기가 유행이야. 

우리 OO이도 그때 말이 안 터져서 애 먹었는데 갑자기 잘하게 됐잖아. 걱정 마."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모든 상황과 이야기는 큰 손주 이야기로 귀결되므로 이제 나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어머님은 내 아이를 그저 온전히 아이 자체로 봐주실 수 없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내 친정엄마도 큰 손주는 너무나 사랑하고 예뻐하는데, 어쩐 일인지 같은 아들인 둘째 손주는 좀 덜 예뻐하시는 게 눈에 보인다. 내가 그 점에 대해 몇 번 지적했지만, 내가 그렇게 티 나게 행동했냐면서 자제해야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신다. 그 말인즉슨, 실제 마음은 정말로 큰 손주가 예쁜 게 맞는데 작은 손주가 서운하지 않도록 마음과 다르게 자제해야겠다는 뜻이라서, 큰 손주가 정말로 더 예쁘다는 말인 거다. 


우리 엄마도 이러는데, 시부모님이라고 다르겠냐 싶어서 나는 그냥 포기하고 단념하기로 했다. 내 자식 내가 많이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면 되지 매일 만나지도 않는 친할아버지, 할머니가 조금 덜 예뻐한다고 무슨 상관이냐 싶은 거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아무리 단념했다고는 해도, 일상에서 정말 큰 손주를 향한 사랑을 물심양면으로 표현하고 숨기지 못하는 시부모님이 아주 조금 서운할 때는 있다. 그냥 내 마음만 조금 서운하고 말면 되는 일이라서 크게 상관은 없다. 


그래도 시부모님은 카톡 프로필에 큰 손주 사진과 작은 손주 사진을 번갈아가면서 바꾸시면서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서 올리는 노력으로 당신들은 똑같이 손주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필하시려고 신경 쓰고 계셔서, 그 노력에 감사하고 말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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