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미안해, 나 좀 늦을 것 같아'
미안해 죽을 것 같은 남자친구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막 송파를 출발했다는 남자친구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여의도까지 족히 30분은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퇴근 러시아워를 고려하여 평소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이미 다음 정류장이 약속 장소였다.
'괜찮아. 서점에 있을게. 도착하면 연락해!'
다행히 우리의 약속 장소는 거대 쇼핑몰이었다.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그런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을 곳이었다. 잠시 '코트 안에 입을 니트를 살까?' 하다 곧장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 초입엔 각종 전자 관련 제품들을 팔고 있었고, 문득 지난 여행에서 나눠 썼던 이어폰의 불편함이 생각났다.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하나? 싶었던 더블잭을 여기서 살 수 있겠다 싶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더블잭도 샀겠다 이어폰 구경도 좀 하다 보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문구류 코너로 향했다. 덕분에 코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엽서들도 몇 장 샀다. 서점에 들어선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손에 쥐어진 더블잭과 엽서 몇 장으로 괜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서점을 구경할 차례였다. 먼저 서점 입구에 전시된 이 달의 베스트셀러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걸 보고 있자면 동시대 독서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물론 제법 괜찮은 책들을 얻기도 한다. 얼마 전에 그렇게 얻게 된 책은 이석원 작가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손쉽게 읽어 내려갔던 그 소설은 그 날 밤 E-BOOK 결제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신간 도서들을 프리뷰 하기에 베스트셀러 코너 만큼 좋은 곳도 없다.
베스트셀러를 지나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코너들을 들린다. 서점 탐방에 있어 인문 코너를 시작으로 소설을 마지막 종점으로 찍는 편인 내게, 경제와 자습서 코너는 관심 밖 영역임으로 과감하게 지나친다. 그렇게 자신에 취향에 맞는 코너를 찾아가면 역시나 그 분야의 신간과 스테디셀러들이 한 가운데 진열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나 인문 코너를 지날 때)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을 마주할 때면 괜한 죄책감 마저 든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그중 관심 가는 제목의 책 도입을 꼭 읽기 마련인데, 그러다 그 책이 재밌다면 그 날의 너를 기다리는 시간은 인문서를 읽는 시간이 된다. 하지만 짧게 읽는 인문서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사실 인문 코너를 제일 처음 가는 이유는 바로 그런 연유에서 있다.
역시나 소설 코너가 가장 재밌고 즐겁다. 최근엔 신간과 스테디셀러뿐 아니라, 각종 책 관련 프로그램이나 팟캐스트 선정 도서들을 따로 진열해 놓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들은 크게 나라별로 구분되어있고, 그 아래 하위 개념으로 제목별 혹은 작가별, 출판사별로 나뉘어 있는 책들을 보고 있자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대서 오는 이상한 만족이 있다. 요즘 한 작가의 전집이나 시리즈 물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책 디자인 자체가 예뻐서 다 소장하고 싶을 때가 있다. 최근에 그 디자인에 반해서 산 책이 바로 펭귄북스 마카롱 시리즈였다. 비록 그렇게 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반쯤 읽다 말았지만 말이다.
오늘은 평소 읽어야지-하고 벼루던 김훈 작가의 신작을 꺼냈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책 명과 동명의 첫 글 <라면을 끓이며>를 몇 장 읽다 자리를 찾아야지 마음먹었다. 그리 멀지 않은 기둥 밑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자리잡은 채 책을 읽고 있었고, 다행히 반대편 기둥 아래 빈자리를 발견하곤 냉큼 앉았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건, 오늘 너를 기다리면서 읽을 책을 만났다는 것이다.
서점의 책은 내 것이 아님으로 최대한 깨끗하게 읽어야 한다. 읽은 티 나지 않게 읽는 것이 서점 과객(?)의 제 1 철칙이다. 조용한 서점 안에서 책을 읽는 데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언컨대 '가장 진중하게 책의 도입을 읽을 수 있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적당히 산만한 상태에서 그 책을 만났을 때, 그 어느 때 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다 보니 정말 제대로 그 책을 읽게 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뒤는 쉽게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라면을 끓이며>는 서점에서 읽기에 좋은 시작을 가진 책이었다.
앞서 큰 대형서점들을 얘기했는데 가끔 중고서점에서 약속을 잡기도 한다. 특히나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을 땐, 교보문고보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나기로 하는데 거기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다름 아닌 우연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일반 서점과 달리 개인으로부터 납품된(?) 책들만 있는 중고서점을 특성상, 어떤 책을 봐야 한다는 기대가 없기에 불 규칙적으로 꽂혀있는 책들 속에서 보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을 때의 묘한 즐거움이 있다. 특히나 그 책이 보통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절판된 책이라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서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자칫 버려지는 시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 서점에서 보내는 기다림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뀐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발견하기도 하고, 원하는 책을 찾을 수(혹은 발견할 수) 있기도 하며, 원하는 지식과 감정들을 원하는 만큼 체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게 값질 수 있는 건, 그 누군가가 나를 만나러 와주는 그 시간까지의 제한성 때문이다.
'많이 기다렸지? 아직 서점이야?'
한참 책을 읽는 중 네 문자가 왔다. 나는 곧장 '책장 사이에 있는 날 잘 찾아줘'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곤 곧 내 앞에 도착할 너를 기다리며 책을 덮었다. 책을 덮기 전, 다음에 읽기 위한 페이지 확인은 필수! 얼마 있지 않아 빼곡한 이 책 숲에서 나를 잘 찾아준 남자친구는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고 나타났다. 하지만 괜찮다. 덕분에 '나 방금 김훈 작가 신작을 읽었는데...'로 시작한 대화를 네게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서점에서 너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언제나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