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구 Jan 04. 2016

너의 향기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내가 냄새에 민감하다는 걸 깨달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나는 다른 사람에게 굉장히 무심한 사람이었고, 그런 나는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라는 이상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반 친구였던 A가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어른스러웠던 그 친구는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두터운 신뢰는 얻었는데, 그런 신뢰를 내가 보이지 않음에 나를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미안하지만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한 그 친구의 친절이 나는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긴 단발머리에 마치 엄마 마냥 친구들에게 말하는 그 어투도 싫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이건 A는 나와 가까워지기를 노력했다. 친하지도 않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도 했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일부러 나를 챙겼다. 그런 A의 노력에 얄팍한 죄책감을 느꼈던 나는 어린 마음에 A와 친해져야겠다 마음먹었지만 그것도 단 한순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 친구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이라는 걸 인지했다.


 유별나게도 나는 A에게서 나는 냄새가 불편했다. 맹세컨대 악취와 같은 나쁜 냄새가 났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된 집에서 나는 듯한 낡은 냄새가 A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그 냄새는 놀러 갔던 그 친구의 집에서도 났는데, 그 친구의 집이 갓 지어진 아파트였던 걸 생각해보면 집 자체에서 나는 냄새는 분명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자연스레 나는 그 친구를 조금씩 멀리했다. 그리고 이것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배척했던 내 최초의 경험이기도 하였다.


 그 후로 나는 사람에게서 나는 체향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나 사랑에 빠지는 데 있어서 상대에게 나는 냄새는 참 중요했다. 어떤 당신에겐 새 가구 냄새가 났고, 또 다른 당신에겐 아빠가 쓰던 스킨의 마지막 잔향이 났었다. 물론 향수를 뿌려서 나는 인공적인 냄새도 좋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냄새 이면에 있는 진짜 그 사람의 냄새가 훨씬 좋았다. 그 이면의 냄새들은 나로 하여금 이상한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냄새를 떠올리면 늘 적당한 온기가 함께 떠올랐다. 어떤 시원한 향수의 잔향도 내게 기억되는 내 사람의 냄새들은 늘 따뜻했다. 



꼭 비싼 향수가 아니어도 좋다. 섬유 유연제 냄새가 얼마나 좋은데!



 몇 해 전, 뜨거운 라디에이터 바람이 부는 편집실에서 우연히 맡은 냄새 하나가 있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비련의 여주인공이었고, 감정이 늘 이성 위에 머물러 있었다. 추운 겨울밤, 데드라인을 얼마 남지 않은 편집을 하려고 슬픔에 허우적대던 몸뚱이를 이끌고 편집실 책상에 앉았던 그 때, 더운 라디에이터 바람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겉 옷을 하나 둘 벗던 도중 맡았던 그 냄새에 순간 마음이 달그닥 거렸다. 갓 세탁된 면 조직과 조금은 쾌쾌한 먼지 냄새가 뒤섞인, 다름 아닌 몇 일밤을 꼬박 그리워하던 전 남자친구의 냄새였다. 비록 윙윙 돌아가는 라디에이터 바람에 짧게나마 느낀 냄새였지만 그 냄새가 불러일으킨 감정은 쉽사리 주체할 수 없었다.


 문득 이제까지 내가 안도를 느꼈던 너의 냄새는 그 누구의 체향도 아닌 내 스스로의 체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이제까지 내가 좋아하던 그 사람들의 냄새들은 '향기' 자체가 아니라, 내 체향이 어우러졌을 때 전혀 무리 없던 베이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내 스스로를 가장 '나 답게 만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하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그 친구를 좋아했던 마음을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다. 얄팍하게 나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순도 백퍼센트임을 증명받은 느낌이었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금의 남자친구 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난다. 나보다 훨씬 따뜻한 사람인 그 친구의 냄새는 다정하며, 안정적이다. 그런 너의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졸음이 몰려온다. 친절하게도 내가 후각에 예민하다는 걸 아는 남자친구는 언제부턴가 날 만날 때 마다 같은 향수를 뿌려준다. 언젠가 공항 면세점에서 나는 가진 잔돈을 모두 털어 남자친구가 쓰는 향수를 산 적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가도 문득 네 생각이 날 때면 나는 그 향수를 꺼내본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네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너의 향기라는 건 내게 늘 그렇다. 그리고 분명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네 냄새를 기억할 것이다. 우연히 네가 가진 그 향기와 닮은 냄새를 맡게 된다면, 나는 당연히도 네 어깨에 기댄 그 시간들을 추억할 테니 말이다. 본능적으로 순도 백 퍼센트의 내가 사랑하던 너를.


 더불어 너를 만났던 그 시절의 가장 나 다운 나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점에서 너를 기다리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