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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구 Mar 06. 2016

순간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몇 해에 걸쳐 두 번의 수술을 한 적 있었다. 우연한 검진을 통해 발견된 종양을 떼어내는 제법 큰 수술이었는데, 사실 수술을 하기 전까지 그렇다 할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것도 그럴 것이 통증이 없었으며 그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덕분에 아무런 겁 없이 들어간 수술실은 9시간이라는 긴 수술이 되었고, 한 달이라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처음 수술방을 나와 회복을 했던 그 밤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8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 세 번 맞을 수 있는 모르핀의 약발이 떨어지던 순간, 생애 처음 겪는 고통이 사지들 뒤덮었다. 처음으로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맛봤고 그게 내 첫 번째 수술이었다.


 두 번째 수술은 그 후, 1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종양의 크기가 워낙 컸던 데다가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지라 한 번의 수술만으로 모두 제거되지 못했다. 두 번째 수술은 이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처음의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는 어떻게든 수술을 미루려고 발버둥 쳤다. (더불어 병원 그 특유의 분위기가 싫었다. 그 곳으로 돌아가면, 아팠던 내 지난 날이 다시 돌아 올 것만 같았다.)


 첫 수술이 끝나고, 나는 처음으로 내 육신이 정신을 배반하는 경험을 했었다. 수술 이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따라와주지 않는 몸뚱이를 가지게 되었고, 더불어 우울증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난 '우울하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던 아이 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불편할 만큼 예민했다. 하지만 그때 온 우울증은 이제껏 내가 입에 달고 살던 우울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의미가 없었다. '슬프다'와 '우울하다'완 분명 다르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행동들에 의미가 사라졌고, 이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의미 또한 사라졌다. 그 의미 없음이 가장 정점을 찍었을 땐, 한 달이라는 병원 신세를 지고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고향과는 먼 곳에서 한 수술이라 당시 병문안을 오지 못한 친구들이 그런 나를 위로해주러 우리 집을 들렀고, 나는 때 마침 온 수술 후 통증으로 그 친구들의 마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방 안에서 울었다. 마음만큼은 내 한 달 치 병원 생활을 주절거리며 응석을 부리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처음엔 그 상황에 화가 났고, 친구들이 떠나곤 내 말을 듣지 않는 이 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의미 없음이 들이찼다.


 그런 '의미 없음'은 수술 부위가 거진 다 아물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계절은 바뀌었고 어느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어떻게든 혼자 버텨내 보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던 밤, 막막함 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의 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이제껏 내가 생활해 온 환경 속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먹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덧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하루 속에서 마음이 가장 그랬던 건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였다. 그런 시간들 속의 하루하루는 보낸다기보다 버리고, 버티는 하루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깝지만 먼 친구 A의 연락이 왔다. '영화 보자!'


 가깝고도 먼 친구 사이인 A와 나는 학부 1학년 때 생각지 않은 소개팅으로 만났다.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만난 소개팅 상대 치고 A는 굉장히 좋은 대화 상대였다. 동갑 스무 살 남자아이였지만 대화를 하면서 나보다 훨씬 똑똑하며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A는 돌이켜 봤을 때, 취향이라는 것도 없던 무지렁이인 내게 동경의 대상과도 같았다. 어쩌다 보니 소개팅 같지 않은 소개팅 이후, 우린  꽤 오랜 시간을 좋은 친구로 남게 되었고, 더불어 공통의 관심사였던 영화를 함께 보는 좋은 영화 메이트가 되어있었다.


 서울의 동쪽 끝인 A의 집과 당시 우리 집 가운데는 광화문이었다. 때마침 광화문에는 씨네필이고 싶었던 우리에게 시네큐브라는 꽤나 좋은 영화관이 있었다. 좋은 영화들이 늘 상영했고, 봤던 영화에 대해 얘길 하기 좋은 술집도 많았다. 그 날 또한 A와 나는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당시 A는 내 상태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A가 군복무 중이었기도 했거니와, 나 역시나 내 상태에 대한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만큼 적당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었기에 가능했다.


 간단한 점심식사 후 함께 봤던 영화는 좋았다. 하지만 뭔가 그걸로는 부족했던 우린 네 시간쯤 뒤에 있는 다른 영화를 예매하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적지도, 많지도 않은 4시간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차, 우린 가까운 광화문을 가기로 했다. 영화관을 나서자 때 마침 밖은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 사이로 우산을 꼭 쥔 채 도착한 경복궁은 하필이면 이미 폐장시간이 지나버렸다. 어쩌지란 마음도 잠시, 그 주변을 어슬렁 거리던 우린 경복궁 담장 근처 작은 처마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잠시 앉아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처마 밑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했다. 아무도 없는 오후, 처마를 따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한동안 연락되지 않았던 서로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A의 취사병 일상에서 시작된 우리의 잡담은 나보다 훨씬 많은 양의 독서를 하는 A의 책 얘기, 오늘 봤던 영화 얘기, 근래 서로가 듣고 있는 노래까지 끝을 몰랐다. 최근에 가장 좋았던 앨범이라며 Charlie Haden의 Nocturne을 아이폰으로 틀었던 그때, 그 앨범 전부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다. 4시간이란 시간을 비가 내리던 처마 밑에서 보낸다는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얘길 하다 문득 영화 시간 15분 전임을 깨달았다. 광화문에서 꽤나 멀었던 시네큐브까지 늦지 않으려 꽤 빠른 걸음을 걸어야 했는데, 그러다 문득 눈 앞에 횡단보도 초록불을 보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뛰어!'란 말과 함께 달렸다.


 그 '순간'이었다. 바람에 집어진 우산을 접고 달렸던, 그래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음에도 순간에 이상한 에너지가 들이찼다. 왠지 모르지만 그 짧고 정신없는 그때, 광화문 광장을 돌아봤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정말 슬로우 비디오처럼 한 프레임 한 프레임씩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와, 푸른 광화문 광장과, 하나 둘 불을 밝히던 빌딩들 사이에서.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시간을 잃은 순간이 정말 또렷하게 느껴졌다. 글로는 형용할 순 없는 횡단보도의 녹색 바가 몇 칸 남지도 않았던 그 순간이, 정말 영원처럼 느껴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달리고 났더니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이미 온몸은 비에 젖어고, 그때 이제껏 내가 가진 무의미함이 순간의 열 오름으로 달아남을 느꼈다. '나 방금 되게 엄청난 경험을 했어-' 내가 순간 느꼈던 이 감정에 대한 얘기를 A에게 했을 때, A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마땅히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을 글과 말로써 표현할 순 없었다. 그건 오롯이 나 혼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이상한 체험이었으니 말이다.



비가 내리던 그 날의 광화문은 분명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순간'을 믿는다. 광화문을 내달리던 그 순간의 경험으로 하여금, 나는 좋은 것들은 언제나 '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누군가에겐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 사이에서의 순간이 너무나 허무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순간은 전부, 그 이상의 것이다. 작은 그 감정 하나가 그때의 내 모든 것들을 바뀌게 했던 것처럼. 그러고 나는 차츰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만났으며 적당히 웃고 떠들 수도 있었다. 마치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다.


 그 이후의 내 삶의 커다란 잣대 하나가 생겼다. 좋은 순간에 마음을 다하자. 행여나 내가 마음을 다하는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언정, 그 좋은 순간은 분명히 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나라는 사람을 살아가게끔 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생긴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우울하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이후의 좋은 순간들에 둘러 쌓여있다. 처음으로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여름밤도, 아무도 모르던 세연정을 함께했던 순간도, 내 이름을 불러주던 전화 속 그 목소리를 듣던 아침도, 리스본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의 사소했던 필담도, 최근에 본 영화 <캐롤>의 한 장면도, 그 모든 좋은 것들을 한 데 모아 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 순간 안에서 나는 오늘도 행복할 예정이다.


 아, 시간이 한참 흘러, 오랜만에 만난 A에게 당시의 내 상황과 그때의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A는 그때 내 상황에 적잖이 놀랐고, 그런 나를 알지 못해 되려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A에게 앞서 체험한 '순간'에 대한 얘기를 하며, 언제나 그렇게 가깝고도 먼 자리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적당히 가깝고도 먼 친구사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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