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합니다.
사람을 피해 집순이 생활을 꽤 오래 한 적 있었다. 모임을 주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던 나로서 그 짧지 않은 시간들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았고, 다른 것보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처음엔 핸드폰을 꺼놨고 각종 SNS를 탈퇴했다. 물론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연락 정도에는 답장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끊어졌다. 그리고 곧 오롯한 혼자가 되었다.
처음엔 이 혼자가 괜스레 쿨하게만 느껴졌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 같아서. 적당히 먹고살기 위한 관계만을 유지하고 남는 시간들을 그렇게 혼자 보냈다. 미루기만 했던 독서를 시작했고(어쩌면 도피성 독서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혼자 영화관에 가서 원하는 영화를 봤다. 늘 약속과 함께 동반되는 식사가 사라지니 제법 루틴을 갖춘 나 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으며 그 나름의 즐거움도 생겼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들이 익숙해져 갔다.
물론 그 기간에 아주 가끔 만나던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던 나를 부러워했다. 당시 혼자인 것이 내 본성이라 여겼던 나 또한 그 칭찬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로 인해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감정의 무뎌짐'이었다.
처음엔 감정이 무뎌지고 그 자리를 채우는 고요가 안정이라고 믿었다. 나약하게 늘 요동치던 감정들이 천천히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했지만 그럼에도 고요한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나름 어른이 된 것 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무딘 마음은 곧 삶을 즐겁게 해주던 얄팍한 재미마저 앗아갔다.
점차 모든 것들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큰 자극이 없지 않은 이상 감정에 동요가 없었고 그것들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정이 사라지니 일상은 단순히 내가 해야만 하는 루틴으로만 채워졌다. 언젠가부터는 그 루틴만이 나를 증명하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스스로가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에너지를 잃은 것이다.
한동안 그 사라진 에너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려 애썼고 평소 하지 않던 행동들을 (물론 혼자)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 시도들 조차 부질없다 여겨지던 어느 봄날, 나는 마지막 보루라 생각했던 여행을 떠났다. 몇 해 전, 소설 <금각사>를 읽다 그놈의 금각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떠난 여행과 그때 얻은 에너지를 기억하며 무작정 교토행 비행기표를 예매한 것이었다. 물론 그 여행에서 만난 5월의 녹음은 좋았다. 비 오던 아라시야마는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좋은 것을 경험하는 데 있어 오는 에너지 또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곤 슬퍼졌다. 여행도 어느새 익숙해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여행으로 비슷한 또래의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연히 같은 게스트하우스, 같은 방을 썼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까워졌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크게 없었기에(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간다 생각했기에 가능한) 대화들은 그들이 다행히도 좋은 사람임을 증명시켜주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낯선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만하게도 나는 내가 정의한 세상이 전부라고 믿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어쩌면 그 티를 낼 수 없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내가 '안다'라고 정의한 세상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들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었고, 그것은 내 생각들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정작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그룹의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나 역시나 내가 속한 사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아주 협소한 세계였을 뿐, 여행에서 만난 낯선이 들은 그 세계가 얼마나 좁은 우물이었는지를 상기시켜주었다. 나로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들과 각자만의 이야기를 접할수록 그 생각은 명확해졌다.
점점 나이가 들 수록 내가 속한 세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필요 없음을 동시에 느낀다. 그 필요 없음은 사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그리고 내가 그렇게 오롯한 혼자가 되려 노력했던 이유였음을 나는 낯선 타인을 통해 그렇게 증명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안다'라 믿었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자 그 사이로 묘한 에너지가 들이찼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다름 아닌 '모른다'로 부터였다.
'밖을 나와. 그리고 네가 존경할 수 있는 지점을 가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언젠가 찾아간 내 선생님께서는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야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로 말씀하신 적 있었다. 당시 오롯한 혼자에 익숙하던 나는 그 말씀이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혼자일 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고요를 왜 스스로가 파괴한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모른다'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경험한 이후, 그분이 어떤 의도로 내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지를 뒤늦게 이해하였다. 결국 우리가 얻어야만 하는 에너지는 내가 얼마나 작고 미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아주 작은 것들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걸. 결국 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가진 그 작은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후 나는 밖을 나섰다. 의도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애썼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모르는 사람을 막 만날 수 없을 테니,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심연의 인간 혐오를 증명시켜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에너지를 나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얻고 있다. 그들을 통해 잊고 지내던 유대의 즐거움도,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경각심도,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무궁무진한 호기심도, 모두 '낯선 그들'로부터 얻었다. 그 에너지는 분명 나 홀로 절대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며 어떻게든 '사회'라는 세계에 속한 우리가 인정해야 하고 그 사이에서 가치를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그 에너지를 인정하는 이상, 나는 언제든 먼저 낯선 이에게 말을 걸 용기를 가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