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두 Dec 31. 2020

이 실화는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

인간의 엔딩은 정해져 있다. 삼단 논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바로 '죽음'이다. 물론 이것은 소크라테스만 겪을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면 그 작가는 결말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에는 죽게 될 테니까. 어쩌면 결말이 뻔한 이 소설은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어차피 죽을 텐데 뭐.


이 리뷰는 영화를 보고 깊이 생각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시청하신 후에 읽기를 권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소설이 걸작이 될까.


이 영화에는 인생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등장한다. 이 작가는 주인공의 인생을 소설로 쓴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의 죽음이다. 소설의 큰 줄기는 작가가 쓰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선택권이 있다. 주인공이 큰 줄기를 따르지 않으면 소설은 진행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설에는

"주인공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같은 내용이 있지만

"주인공이 왼쪽 발을 디딘 후 오른쪽 발을 디뎠다"

같은 디테일은 적혀있지 않다. 그러면 주인공은 걷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스토리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스토리가 멈춘 소설이 망작이 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이 소설이 걸작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작가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야 한다. 예컨대 작가인 캐런의 스토리를 주인공인 해롤드가 따라가면 해롤드라는 작품은 걸작이 된다. 그리고 이쯤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걸작이 되어야만 하는가


해롤드는 지금까지 지루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늘 타인이 정해준 규칙과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레이션이 들리기 시작한 후 그는 정해진 스토리를 벗어나려 애쓴다. 사랑하는 안나를 만났고, 친구와 함께 지내고, 기타도 배우면서 삶의 의미를 배우던 중이었다. 캐런은 이제 막 삶을 사랑하기 시작한 해롤드를 버스에 치어 죽는 결말을 쓴다. 불쌍한 해롤드는 본인을 그런 식으로 죽이지 말아 달라고 캐런에게 부탁해보지만, 문학 교수는 해롤드가 작가가 계획한 시점에, 그 장소에서 죽지 않으면 그는 그저 그런 평범한 작품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해롤드는 걸작인 인생으로 남기 위해 죽기로 결심한다.



캐런은 결국 그를 죽이진 않았다. 걸작을 포기하고 그저 그런 범작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 삶이 범작이 되었는가. 보면 그렇지 않다. 그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안나와 함께 하는 삶은 여전히 반짝인다.


어차피 죽을 평범한 인생이 어떻게 반짝이기 시작했을까. 해롤드는 내레이션을 듣기 시작했을 때도 삶의 큰 요동이 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캐런의 죽음 예고 내레이션이었다. 아마도 해롤드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냈던 것 같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내레이션을 들은 해롤드는 삶을 바꿔보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그렇게 해롤드의 삶은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을 듣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삶은 언젠가 끝나고,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 죽음은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조금은 진부한 메시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에 매몰되어 살다 보면 늘 잊는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 때 가장 반짝이는 삶을 살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