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재난 영화는 늘 우리에게 ‘저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탁처럼, 민성처럼, “내 가족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지”라든지 명화나 도균처럼 “내가 좀 불편해도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같은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우리 사는 세상이 문명화되어있고, 영화 속 세계관과는 다르게 질서 있다고 선이 그어져 있다. 문명인인 우리는 디스토피아 영화 속 광기와는 멀리 떨어져서 그저 상상으로만 편을 갈라 니가 틀리네, 내가 옳네 할 뿐이다. 영화는 아파트를 통해 어쩌면 적나라하게 이미 우리의 본능에 뿌리내린 집단 이기주의를 비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아파트는 안 저래, 경비실에도 에어컨이 달려있고, 택배 기사님 드시라고 레쓰비도 한 박스 놔뒀는걸” 같은 말로 자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여기서 예외일 수 있을까.
집단 이기주의는 여러 상황에 등장하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집단 이기주의는 국가 단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는 정치나 외교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영화 속 무질서함이 국제 관계에서 쉬이 발견된다는 것쯤은 안다. 가장 점잖은 양복을 입은 국가 정상들의 가식 어린 미소 뒤에 폭력이 숨어있다. 어떤 나라들은 국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특정 인종이나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혐오하는 정치를 하거나, 국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타국의 자원을 약탈하기도 하고, 약탈의 과정에서 폭력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국가의 안보와 경제적 안전망이 타인을 배척함에서부터 오는 건지도 모른다. 비단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기업문화를 봐도 그렇고, 동네 골목 상권 탕후루 집을 봐도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개인에서 국가까지 뿌리 깊이 박혀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는 선을 그을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현실의 우리는 황궁아파트에서 어느 쪽일까. 아니 어느 쪽이 세상을 더 살만하게 만들까. 나는 주저 없이 명화를 응원하려 한다. 쉬운 길이라는 건 아니다. 생판 남을 우리 집에 재우는 게 편할 리가 없고, 모자라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게 더 배부를 리가 없다. 감독도 이를 알고 있는 듯하다. 명화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기 일쑤고, 마땅히 대안도 없을뿐더러, 도균은 결국 자살을 한다. 엔딩 이후에도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을 구출하고,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고, 난민들을 살린 건 광기의 순간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들이 나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직 인류는 소위 강한 자만 살아남는 시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아이언맨 수트가 아니라 토니 스타크의 따뜻한 마음이 구하는 것처럼, 영탁의 주먹보다 명화가 받은 주먹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