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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 Sep 09. 2017

[아이캔스피크]

기억에 대하여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어린 아기가 뜨거운 찻주전자에 손을 댄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뗀 아이는 울고, 손을 덴 아이를 발견한 부모님은 아이를 달래줄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그 후로 주전자는 뜨거운 것이라고 "기억"하게 된다.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화상을 입지 않으려면 주전자가 뜨겁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역사도 그렇다.

제목만 보고 <영어완전정복>을 떠올렸는데, 영화의 후반부는 오히려 <귀향>이나 <눈길>에 가깝다. 그렇다. 이 영화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다룬 영화다. 그래서 앞에 한참 다른 소리를 했는데, 스포일러를 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해서 윗 문단을 채운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한번 더 기억할 수 있겠다.


원래 쓰고 싶었던 부제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다."였다. 그런데 스포일러로 영화를 망치지 않았으면 해서 맘에는 덜 들지만 부제를 바꿨다. 나도 안다. 정식 명칭이 일본군 '위안부'라는 거. 그런데 이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할머니의 '삶'을 조명한다.


그 끔찍한 일을 겪은 할머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극 중 나옥분 여사는 원칙주의자에 오지랖이 넓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일본군 '위안부'사건이 그 성격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던 상식과 원칙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반인륜적 사건에 대한 반작용으로 원칙을 고수하게 되셨고, 외로웠던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에 그 원칙을 들이대며 오지랖을 떠신 걸로 보인다. 마음에 쏙 드는 캐릭터 설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 속에 '사람'이 있다. 영화에 나온 옥분의 친구 정심은 위안소에 옥분과 같이 있던 친구다. 정심은 옥분과는 또 다른 성격이다. 할머니들은 다 다르다. 각자의 삶을 산다. 살아있음으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항변을 하신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기억해야 하지만 오히려 그분들로써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것임에도 그분들은 잊지 않기를 선택했다. 오히려 또렷이 기억하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당위가 생긴다.

아쉽게도 영화적으로 보면 스토리는 뻔하다. 그냥 롯데에서 배급할 만한 그저 그런 영화의 스토리와 다르지 않으나, 소재는 롯데에서 배급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영상과 연출은 깔끔하고 특출나진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선방했다. 호박 고구마 나문희 할머니의 연기는 능청스러우면서 박력 있고, 감성적이다. 코믹한 연기를 잘하는 것은 원래부터 알았지만 <수상한 그녀>에서보다 한층 더 깊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제훈은 나문희의 연기를 제대로 서포트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 뻔한 영화가 나올 수는 있지만, 이런 소재는 뻔하게 끝나면 안 된다. 엄청난 연기력으로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나면 영화가 끝났을 때 후련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여운을 길게 남길 수 있게 연출했다면. 조금 더 담담하고, 좀 더 먹먹해서 눈물을 쏟아내지 않고 가슴속에 머금고 있게 했다면 어땠을까.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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