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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 Mar 02. 2019

[어느 가족]

뭐라고 부르는 게 그리도 중요했을까

유튜브: https://youtu.be/0nqEgOdWAso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뭐라고 부르는 게 그리도 중요했을까. 전통적인 가족관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사람들의 모임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노부요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말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린이와 다른 가족들의 안위였다. 남이 뭐라고 부르든 노부요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 가족들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들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한 집에 모여 살던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생물학적 가족들에게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그들을 향해 감독이 가족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가족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다.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사회가 보호해주지 못하는 아이들을 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복지 밖에서 보호받는 아이들을, 시스템이 위협하도록 만들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아이들이 모두 생물학적 가족들에게서 상처 받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와 국가의 규칙을 모두 깬다. 먼저 그들은 법으로 규정하는 가족이 아닐뿐더러, 그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도 법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린이를 가족으로 들일 때도 그냥 데려왔다. 또 물건들을 훔치고, 유사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논리는 명확하다. 오히려 사회의 규칙을 부정하고 사회가 합의한 단어의 의미마저 부정한다. ‘워크 셰어’, ‘버리다’, ‘도둑질’,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를 부정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의미로 단어를 사용한다. 그들만의 언어를 만드는 일은 시스템 안에서 또 다른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사회는 그들을 ‘유괴범’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쇼타는 오사무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남의 시선이나 호칭이 무슨 상관이었을까.

어떤 영화들은 영화관의 문을 나가면서 시작하기도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에 삶으로 답해야 하는 영화들이 그렇다. <어느 가족>은 그런 질문을 한없이 쏟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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