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사랑

뮤지컬 <아르토, 고흐>

by 소소담

얼마 전, 습관적으로 교보문고에 들어갔다가 한 줄의 문장에 얽혀버려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속의 한 문장.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그 안에 수많은 삶들이 지속될 수 있는 동력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책에서는 어떤 사랑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궁금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세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인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톨스토이는 인간은 결코 자신에게 닥쳐올 일들을 알 수 없으며 이에 대해 자신만을 걱정하며 사는 듯하지만 결국 인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피고 베풀며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답한다.


‘사랑’.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공존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많이들 역설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것들이다. 먼저는 사랑이 있어야 세워질 수 있는 가치들이다. 사랑이 깃든 배려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존중과 인정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상처까지도 품어줄 수 있다. 사랑이 있어야만이.


내가 좋아하는 공연 중에 이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뮤지컬 <아르토, 고흐>.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 넷이 나온다. ‘앙토냉 아르토’, ‘반 고흐’, 그리고 둘의 정신과 담당의(지만 동일 배우).

작품은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아르토’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자신의 담당의와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일방적인 소통을 한다. 둘은 분명 서로를 마주하며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경청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아르토’는 꿈 속인지, 환각인지 그 안에서 오래전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고흐’를 만난다. 둘은 그 누구도 이해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각자의 세계를 각자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아르토’는 연극으로, ‘고흐’는 그림으로.

둘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 주고 치유해 준다. 환상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아르토’는 ‘고흐’가 생을 마감했던 마지막 장면을 재현하며 그 또한 생을 마감하고 이 극은 막을 내린다.


사실 이 작품은 조금 난해한 작품이다. 두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토해내는 것을 가만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 단어와 문장들을 받는 것조차 버겁다.

그럼에도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상처가 많은 두 사람이. 삶의 결핍과 날이 선 시간 위에 서 있는 두 인물이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상이라 자칭하는 자들과 그 세상으로부터는 존중도 이해도 받지 못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똑바로 마주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시간과 세상들을.

내가 이 공연을 보며 느낀 것은, 이해하지 않아도. 그러지 못해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아르토’와 ‘고흐’는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그 순간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 또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을 했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나도 잠깐이지만 그들의 시간을, 그들의 세상을, 또 그들을 사랑했다. 한 톨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사랑은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해도, 존중도, 인정도, 어떠한 것도.

그러니 내가 타인을 완전히 사랑한다는 건, 그다지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더 깊이 알아내고, 온전히 이해하고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지만 내 안의 사랑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어떤 필요조건도 갖추고 있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