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아있는 사진, 숨쉬는 사진
딸: 아빠, 아빠가 퇴직도 은퇴도 없는 사진작가인 것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저는 회사에서 한 시간만 회의해도 지쳐버리는데, 아빠는 60년 넘게 카메라 들고 다니시잖아요. 비결이 뭐예요? 영원한 청년 에너지 주입이라도 받으셨나요?
아빠: 하하, 그건 사진이 내게 호흡이 되었기 때문이야. 1964년 아빠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큰 형님의 카메라로 시작한 일이지. 큰 형님이 사진을 좋아하셔서 그 시절에 일본사진 잡지를 구독하고 계셨어. 아빠는 그땐 그 일본 사진 잡지들을 보며 혼자 공부를 했지. 잘난 척을 좀 하자면,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공모전에서 꽤 상을 많이 받았단다. 1960년대 고등학생 사진가로 좀 이름을 날렸지. 아빠가 한양대학교에 갔을 때는 한국사진계의 원로인 이경모선생의 추천으로 기라성 이형록 선생이 이끄는 현대사진연구회(한국사진계 전설인 정범태, 이해문, 한영수, 이창환, 백남식, 전몽각, 황규태, 박영숙 등이 함께 활동)에 마지막으로 합류했고, 대학신문사에서 뚝섬과 한강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사진 찍는 게 일상이 됐고. 집이 신촌이니 한강변 또한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들도 다 그때의 연장선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건, 사진 자체가 이미 완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딸: 와, 대단한데요? 근데 아빠, 요즘은 다들 핸드폰으로 찍잖아요. 아빠처럼 큰 카메라 안 들고도 말이죠. 아빠 눈엔 어떻게 보여요? 디지털 세대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빠: 당연하지! 옛날엔 필름이 귀해 한 컷 한 컷에 혼을 담았지만, 지금은 순간의 감정을 더 자유롭게 담아낼 수 있잖니. 핸드폰 사진도 진심이 묻어나면 예술이야. 인스타 보면 내가 못 본 앵글, 못 느낀 감각들이 넘쳐나. 오히려 내가 배울 때가 많아.
딸: 아빠, 그런데 말이에요. 아빠는 가족한테도 항상 카메라의 신 모드시죠? 어딜가든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으시자나요?
아빠: 그건 사진가의 직업병이랄까? 중요한 순간을 놓치면 섭섭하더라고. 근데 넌 어릴 적부터 내가 카메라 들면 포즈 취하던 거 기억하지?
딸: 그럼요. 어렸을 적부터 아빠 광고사진의 어린이 모델로 선 게 한두번인가요? 아빠는 어렸을 적부터 나랑 준규랑 많이 놀아주었던 것 같아요. 어디 멀리는 안가도 가까운 동네 뒷산이라도 가서 놀아주고, 사진 무진장 찍어주고. 지금도 식탁 옆에 걸린 홍제동 뒷 산 바위위에서 찍은 사진이 난 참 좋드라구요~ 가끔씩 주말이면 아빠표 스끼야키도 해주고…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먹었던 ㅋㅋ 책장도 아빠가 나무를 사서 못박고 칠해서 만들고, 부엌가구 선반이랑 다 페인트칠하고 벽도 아빠가 꾸미고, 이야기 하고 보니 엄마보다 아빠가 집안 인테리어에 더 신경을 쓴거 같은데요? 아빠는 목수같은 것을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아빠는 사진만 잘 찍는 줄 알았는데, 인테리어 디자이너 감각도 있으셨었군요. 암튼 아빠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좀 다르게 예술가의 피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예요.
아빠: ㅎㅎㅎ 그건 엄마가 피아노 학원이랑 유치원을 운영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빳지 않니? 그래서 아빠가 때가 되면 페인트 칠도 해주고 그랬어. 벽에 토끼, 코끼리 같은 동물들도 그려주고, 가구도 만들었지.
딸: 하느님이 아빠한테 선물을 많이 주셨네요. 근데 아빠, 진짜 궁금해요. 아빠 나이 또래 분들은 대개 엄격한 아버지 이미지던데, 아빠는 왜 이렇게 다정한 꼰대일까요? 원래 성격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특훈이라도 하셨나요?
아빠: 원래는 고집도 세고 성깔도 있었지. 하지만 나이 들며 깨달았어. 가족에게 무뚝뚝해봐야 말년이 외로워진다는 걸. 너희랑 놀아주고, 스키야키 해주며 보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요즘 아빠들처럼 다정한 꼰대가 되는 게 나의 생존 전략이야! 나이가 들수록 가족들에게 친절해야 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아빠 나이 때에는 아빠라는 역할이 근엄하고 말도 못 붙이게 엄한 그런 모습이 일반적이었지만, 어디 요즘은 그런가? 요즘 아빠들은 가사에 엄청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정하고 그런 아빠들이 인기지. 아빠도 사진만 잘 찍는 게 아니고 설거지도 전문가야. 나이 들수록 배움은 계속돼야 한단다. 그리고 또 겸손이 답이야. 내 사진, 내 생각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마음. 새로운 시각을 키우려는 꾸준한 노력. 이런 것들이 계속되어야 진짜 멋진 어른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딸: 넘 멋져요! 아빠. 저도 회사에서 꼰대 만나면 속 터져요. 여느 때처럼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임원분에게 워크숍 참석자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한 말씀 부탁을 드렸더니 응원은 커녕 어찌나 잔소리를 하시던지 정말 듣기 싫어서 혼난 적이 있어요. 말 그대로 응원을 해주고 바쁜 일과중에 시간을 쪼개서 모인 현업분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의 메시지를 해달라는 거였는데 자기가 바라는 워크숍 결과물에 대한 욕심만 잔뜩 이야기하고나서 참가자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내라고 거의 협박에 가까운 훈수를 두시더라구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도 전에 정말 분위기를 어찌나 촤악~ 가라앉히시는지 다시 그 분위기를 살려서 즐겁고 신나면서도 좋은 아이디어들을 발굴하느라고 애썼던 기억이 나요. 바로 이런 모습이 꼰대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아빠: 그렇지 그런 사람하고는 대화가 되지 않지. 상대방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한마디로 인기가 없어. 그건 나이를 초월해서 마찬가지야. 요즘에 보면 나이들어도 철없는 사람들이 많고, 반대로 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 안 듣고 자기 고집만 센 어린 꼰대들도 많더라. 아무튼 아빠는 나이들고 철없는 사람이나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네가 보기엔 어떤 지 모르겠구나.
딸: 음… 아빠는 완전 꼰대지. 크크킄
아빠: 아니 내가 왜?
딸: 왜라뇨? 그걸 모르니깐 아빠는 꼰대라는거예요. ㅋㅋㅋ 아빠는 참 그걸 왜 몰라~ 아빠 고집데로 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듣기 싫어 죽겠구만 눈치도 없이 이래라 저래라 할 때도 있고, 아빠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핏대 세우고 이야기 할 때도 있고! 우리 아빠가 엄청 온화해 보여도 뭐가 맘에 안 들면 엄청 성깔 있다니깐. 아빠 띠도 소띠자나.
아빠: 하아~ 딸아! 할말이 없구나. 내가 좀 고집이 세긴 하지. 그래도 요즘에는 상대방을 더 이해하려고 하고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지. 사실 나이 들수록 고집이 세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걸 인정하고 조금씩 내려놓는 게 진짜 어른이 되는 길인 것 같아. 어른대접 받으려고 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자랑하는 것, 없는 사람 이야기하는 것 등 더 조심하고 감사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고 말 조심하고…나이 들어서 그러지 않으면 고립되기 쉬운 거 같아. 사실 나이 들면서 여기저기 아프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서 쉽게 피로하고, 소화도 잘 안되니 먹고 싶다고 예전처럼 먹지도 못하고 하면서 이것 저것에 더 까다로워지고 성격도 더 날카로워진다고 느낄 때도 있어. 항상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멋지고 아름답게 늙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끼지. 그래서 가까운 주변사람들에게 실수하기도 쉬워져서 더 조심해야 해. 특히, 엄마한테 더 친절 하려고 노력하지~.
딸: 안 그래도 이번에 금혼기념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면서 제가 느낀 바가 많아요. 두분 보기도 너무 좋으셨고, 뭐가 어쩌니 저쩌니 해도 긴 세월을 함께 한 두 분의 눈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이 참 보기 좋더라구요! 항상 아빠, 엄마가 지금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사이좋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들어요. 저도 가끔 제 고집에 빠져서 남 얘기 안 듣고, 내 방식만 옳다고 우길 때가 있거든요. 근데 아빠처럼 자기 고집을 인정하고,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진짜 멋진 것 같아요. 그리고 가족끼리는 진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대화하고, 서로 응원해주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아빠, 앞으로도 우리 서로에게 꼰대력은 낮추고, 다정력은 높이기로 약속해요!
아빠: 그래 알았다. 나도 그러고 싶구나!
딸: 마지막 질문이에요, 아빠! 아빠 인생에서 사진이란 뭔가요?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고 싶으세요?
아빠: 사진은 내 ‘숨결’이야. 성실한 자세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시선을 통해서 남기는 사진을 찍어야지. 앞으로는 아빠는 살아 숨쉬는 동안은 계속 사진을 찍을꺼야. 그리고 또 중요한 소명이 천주교 신자로서 사진을 찍는 일도 있지. 하느님께 받은 탤런트이니까. 사진이라는 건 단순히 한 순간을 붙잡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를 한 장면에 포착하는 일이란다. 예전엔 특별한 날에만 찍던 사진이, 이제는 일상과 변화의 모든 결을 담는 기록이 되었지.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공간 덕분에 내 작은 기록들이 모여, 결국은 우리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는 것 같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라는 생각이 들어.
딸: 아빠, 진짜 공감돼요. 사진이 그저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기억, 사회의 변화, 사람들의 표정까지 다 담는 매개체라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그걸 디지털로 공유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잖아요. 결국 그렇게 쌓인 기록들이, 우리 삶의 본질과 닿아 있는 거 아닐까요? 사진 속 순간들이 결국 우리 존재의 흔적이니까요.
아빠: 맞아, 사진은 결국 우리 존재의 증거이자, 기억의 저장소야. 디지털 시대엔 기록이 너무 빨리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과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 오히려 그 빠른 흐름 속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 오래 남는 감정과 이야기를 찾아내는 눈이 더 소중해진 거지.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찍고, 기록하고, 공유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계속 찾아가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