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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LKIVE Feb 12. 2020

#A3. 5층 아줌마는 황금손

나의 첫 집, 11동에서의 마지막 이야기

엄마는 첫 신혼집이자 첫 안양시민으로 '안양1동 진흥아파트' 11동에 들어왔다.

낯선 곳이다 보니 지인도 한 명 없고, 결혼과 함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집안일도 처음으로 도맡아서 해본 엄마. 신혼에는 저녁에 일나갔다 들어오는 아빠만 기다리면서 심심하게 집에 계셨다고 한다. 그런 신혼 댁에게 구세주 같은 분이 내려왔으니! 4층인 우리집 바로 위층에 살고계셨던 '5층아줌마'이다.


진흥아파트 저층부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래서 5층에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로 4층이 보인다. 그런 구조 덕분에 이웃 사이에 심리적 거리도 가깝고, 말도 트고 지내기 좋았을 거다.

5층에서 아줌마가 현관문을 열고 'A'야 부르고 엄마가 올라가면 맛있는 반찬을 나눠먹었다, 두 분이 우리집 식탁에 앉아서 김도 굽고, 차도 마시고, 음식도 나누고 했던 풍경이 떠오른다. 나도 아줌마가 우리집에 오시면 '5층 아줌마~' 하며 달려나갔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정확한 성함은 모른다.

(조금 일찍 사진을 찍어두었다면 더 좋았을 거 같아 아쉽다.)


5층아줌마의 손은 황금손이다

손재주가 남다르셔서 뭐든 손만 대면 뚝딱 결과물을 만들어내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댁이 안쓰러웠는지 내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셨었다고 한다.


그녀와 얽힌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는 지금도 그녀의 손길이 남아있는 잔치 상차림이다. 신혼이라 집들이를 준비하는 엄마를 위해 몇 가지 요리 메뉴와 비법소스를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바로 이때! 약 30년간 우리집에서 가족모임을 하거나 중요한 손님들이 오시면 상차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샐러드, 잡채, 꼬막, 나물 반찬 등 스테디 요리가 탄생했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마요네즈를 기본으로 계란, 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갈아만든 샐러드 소스다. 소스만 먹고 싶을 정도로 달달하면서 시큼한데 깊은 맛을 자랑한다. 집에 손님들이 오시면 이 소스가 등장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두 번째는 1997년, 나의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이야기이다. 1990년대 초등학생의 방학은 EBS 방학생활을 시청하면서 기록도 하고, 일기도 쓰고, 곤충채집, 가족신문 만들기, 독후감 쓰기, 폐품으로 로봇 만들기 등 과제가 참 많았다.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놀아도 질리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방학은 그냥 좀 놀게 해주지......


당시 5층아줌마는 중학생, 고등학생 자녀를 둔 베테랑 학부모셨다. 역시 슈퍼맨처럼 내려오셔서 나의 인생 첫 방학숙제를 도와주셨다. 한 여름에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매미를 잡아다가 흰색 스티로폼에 실핀으로 고정시켜 곤충채집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요구르트 빈 통들을 모아서 노란색 돼지표 본드로 붙이고, 색종이로 감싸서 로켓도 만들었다. 나는 조그만 몸으로 개학날 책가방을 매고 한 손에는 신발주머니, 한 손에는 방학숙제를 바리바리 싸서 들고 학교에 갔겠지. 5층아줌마는 흡족하게 나의 등굣길을 보셨으리라.

5층아줌마를 못 뵌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아마 지금 훌쩍 자란 나를 보시면, '어머! 애기가 어떻게 너무 컸어' 하시면서 반가워하실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며 아쉬워하시겠지. 진흥아파트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 왔다 갔다 인사드리면 반갑게 인사해주시던 경비아저씨, 어른까지 잠시 스쳐갔던 아파트 이웃들이 한 명 한 명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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