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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LKIVE Mar 12. 2020

#A5. 8살의 결혼행진곡

90년대 초 어린이의 필수 사교육, 피아노 학원

평일, 초여름, 나른한 오후 2~3시. 바람의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피아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기쿠지로의 여름 OST 'Summer', 이루마의 'Maybe' 등의 연주곡이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에서의 추억이 떠오른다. 피아노의 희고 검은건반, 지겹게 연습한 체르니 피아노 곡들.


우리 각자의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히사이시 조의 연주곡. 기쿠지로의 여름 OST ‘Summer'


"다른 건 몰라도 피아노 '체르니 30'까지는 배워야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80년대에서 90년대 태어난 어린이에게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도장은 한 번은 거쳐 가야 하는 필수코스였다. 안양1동 진흥아파트 키즈인 멤버 A, B, C 모두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멤버 C는 정문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나와 멤버 B는 후문 상가의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나는 8살 때부터 5년 가까이 다녔는데, 성인이 된 지금은 악보 음계 읽는 법도 가물가물하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운 덕분에 만든 뿌듯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금도 내 방 켠에 세워진 액자 속 사진에 남아있는 추억. 바로 '작은 외삼촌의 결혼식'이다.

안양1동 진흥아파트 후문 상가풍경

1997년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다. 작은 외삼촌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엄마 쪽 4남매 중 막내다. 엄마와 큰외삼촌이 결혼과 동시에 안양1동 진흥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리면서, 자연스럽게 20살부터 결혼 전까지 안양에서 함께 살았다. 마지막 결혼 주자라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10대도 못 간 조카만 6명이 있었고, 지금은 없어진 안양우체국사거리에 있던 '결혼회관'에서 식을 올렸다.


나를 포함한 조카 군단은 드레스와 정장을 갖춰 입고 작은 외삼촌 결혼식에 참석했다. 나는 첫째 조카이자 피아노를 배웠다는 이유로 반주자를 맡았고, 둘째, 셋째가 화동을, 남은 3명의 막내는 화동 뒤를 따라가면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나는 총 3곡을 연습했는데 아직도 제목과 음이 기억난다. 입장 때는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 퇴장 때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 축가로는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이었다. 찬송가는 가사도 흥얼거릴 수 있다. 3곡을 한 달간 맹연습했는데, 마지막 일주일은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레슨을 다 마친 저녁에도 나가서 연습했다.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이니 실수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정말 열심히 했었다.


당시 주문도 잊지 않고 있다.

 '입장할 때의 결혼 행진곡은 천천히 쳐야 한다. 왜냐면 반주 속도가 빨라지면 신부의 발걸음이 빨라지니까. 그리고 축혼 행진곡은 신나도 되는데 너무 흥분하지 말아라 실수할 수 있으니' 등. 8살 어린이한테 이 어려운 반주를 왜 맡긴 거지?라고 느꼈던 감정도 기억난다.


다행히 예식은 성공적이었다. 10세 이하로 구성된 우리 6명은 어린이 어벤저스였다. 특유의 해맑음으로 하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나는 흥분하지 않고 제때 맞춰서 반주를 해냈다. 사실 신랑,신부 퇴장 때 긴장이 풀리면서 축혼 행진곡을 맘대로 쳐버렸지만, 하객들의 박수 소리와 환호 소리, 폭죽 소리에 묻혀 아무도 기억을 못 하더라. 이제는 그 조카들이 20대 후반 30대가 되었다. 명절에 다같이 모이면 작은 외삼촌이 가끔 본인 결혼식 때 이야기를 하신다. 조카들 덕분에 뿌듯했다며, 나한테 너희들은 아직도 그때 그 애기들 같은데 이렇게 컸냐며 세월을 섭섭해하신다. 마지막에 언제 결혼하냐고 잔소리도 꼭 남기시면서^^


아마도 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내며 안양1동 진흥아파트 상가를 휘젓고 다니던 꼬맹이들은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도장 중 하나는 어린시절 기억에 남아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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