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계엄과 어린 왕자

by 민트형님

영락없이 30대가 돼버린 지금, 늘 고민하는 주제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른이란, 다 자란 사람,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혹은 결혼을 한 사람등이다. 얼추 자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나 지위가 한 번도 높아본 적이 없는 미혼남인 나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단지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다고 이런 고민에 빠진 건 아니다. 그보다는 지난 10년간 법적인 성인으로 20대를 지내고 난 뒤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어렵사리 꺼내보는 일에 더 가깝다.


그러던 와중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10시 30분경, 뜬금없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 위태로운 관계에 있던 연인이 홧김에 이별을 선언하듯 선포된 계엄에 근처를 서성이던 잠이 달아났다.


계엄이 뭔지. 이걸 왜 지금 한 건지. 서울의 봄에서 언급된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인 그 일이 진짜 일어나는 건지. 오지랖 넓게 이런저런 사람이 걱정되기도 하고 오만생각이 다 들었다. 친구와 짧은 전화 끝에 혹시 모르니 라면을 사놓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종류별로 3팩을 '정가'로 샀다.


여러 생각과 질문, 통화 그리고 라면을 정가로 구매한 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경찰과 군대가 국회에 침입했고, 국회의원이 담을 넘었고, 사람들은 국회 앞으로 운집했다. 일사천리에 국회의장이 쥔 의사봉이 나무판을 두들기며 너무나 어설펐던 그 일은 실패로 끝났다. 언젠가 했던 망한 공모전 과제만도 못한 어쭙잖은 반역을 저지른 대통령을 보며 생각했다.


"뭐 이딴 어른이 다 있지?"


그런 의미에서 어린 왕자를 찾았다.


대통령이 누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주정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과 소혹성 327호의 주정뱅이


어린 왕자는 사랑하는 장미를 별에 남겨두고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왕, 허영심 많은 사람, 주정뱅이, 사업가 등 어린왕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을 보면서 어른들은 모두가 정말 이상하다는 결론을 얻고 (의외로) 평판이 좋다는 지구로 향한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와 나눈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 조종사와 나누는 대화에 비하면 어른을 만나는 부분은 울림 없이 지나치기 쉬운 구간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읽어서인지 이 구간에서 불현듯 겁이 났다.


덜컥.


나도 누군가에게 '어른'일수도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늘 보고 배우는 입장이었던 어렸을 때는 이 이야기를 어린 왕자의 시점에서 읽었다.

하지만 젊지만 마냥 어리지도 않게 된 지금, 이 책을 왕, 주정뱅이, 조종사 등 어린 왕자가 만났던 어른의 입장에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는 어쩌면 나를 보고 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왕자가 지구를 다시 들렸을 때 나를 보곤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 어쩌나, 그런 어른이 될까 겁이 난 것이다.


나도 자라면서 다양한 어른을 만났다. 어떤 분들은 정말 좋은 귀감이 된 반면, 어떤 이들은 치를 떨게 만들었다. 너무 안타깝게도 본받고 싶었던 어른보다 꼭 반면교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든 어른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평판이 높다며 어린 왕자에게 지구 여행을 추천한 지질학자가 떠오른다. 지구가 평판이 높다니, 저 우주는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렵구나. 싶다.


이쯤에서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건 뭘까.

아무래도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 중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에 제일 가깝다.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가치와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앞세대 그리고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본인 선에서 끊고 의미 있는 가치를 주변사람과 뒷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근사한 어른이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윗세대와 아랫세대에게 자신 있게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도 꽤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 없는 어린 새끼들 끄지라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먹어보고 느껴라

구분도 몬 하고 까불다가 거리다 한 놈만 걸리라

이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들 갈아 마시삘라

기회주의의 영악한 늙은이 새끼들 끄지라

처맞기 전에 그 표리부동한 아가리 닥치라

자꾸 뒤에서 거들먹거리다 한 놈만 걸리라

대가리만 굴리는 게으른 새끼들 갈아 마시삘라


_던밀스의 쌀 (feat. 제이통)



약 2-3주간 이런 고민을 이어오던 사이, 대한민국의 주정뱅이는 일자리를 잃게 생겼다. 그는 과연 실업급여를 받게 될까?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는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면 된다


이 일로 나에겐 정가로 주고 산 라면 3팩(벌써 4 봉지를 먹었다), 그리고 어떤 멍청이가 되지 말아야 할지 반면교사할 사례가 (또) 생겼다.


어른의 기준이 단순히 '다 자람'이라면 20대 이후 성장을 멈춘 몸과 곧 굳을 머리를 가진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른이 된다.


나도 곧 어떤 어른이 돼있겠지.


내 자녀든, 후배든, 스치듯 만나는 사람이든, 언젠가 '소혹성 B612호'에서 철새를 타고 날아올 수도 있는 어린 왕자든 날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 없게끔 부지런히 보고, 배우고, 자라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왕자를 잊지 않고 종종 읽어야겠다.



"내가 여기서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친구를 잃어버린다는 건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친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린 왕자를 잊는다면 나도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어른들처럼 될 것이다."

_어린 왕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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