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졌던 것

2024년과 킨츠키

by 민트형님

2024년을 복기해 봤다.


이만큼 똥꾸릉내가 났던 해가 있었나 싶다. 여러 아끼던 것들이 무산되고 부서졌으며, 내가 세상과 타인에게 나름대로 차렸던 친절이 허무맹랑한 불친절로 돌아왔다. 2년간 계약직으로 몸담았던 곳에서 잡힐 듯 말 듯했던 정규직 전환 기회가 약 2개월의 희망고문 끝에 성의 없이 무위로 돌아갔다. 대략 5개월간의 무직 생활은 불합격 통보로 수 놓였다. 무엇보다 나까지 결코 쉽지 않았던 기간 내내 이를 초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하고 몰아세웠다. 억하심정으로 가득 차 견딜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의학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겨우 상황이 개선되던 차에 나를 오래 보살펴준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돌아보니 지난해는 나라는 개인이 참 많이 부서졌던 한 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킨츠키'가 생각났다. '킨츠키'는 도자기 파편을 금 따위로 이어 붙이는 예술이다. 금으로 파편이 이어 붙여진 도자기는 원래 모습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더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킨츠키 공예품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내가 생소한 킨츠키라는 예술을 알게 된 것은 키딩이라는 시리즈 덕분이다.


이터널 선샤인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미셸 공드리와 짐 캐리가 함께한 키딩은 아주 크고 선한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회복하는 과정을 동화적인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인 '제프 피클스'는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 극장'이라는 한국의 '딩동댕 유치원'격의 어린이 프로그램의 호스트를 30년째 하고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의 프로그램을 보며 자라온 모두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그의 차를 훔친 차량털이범이 트렁크에서 그의 소품인 '우쿨래리'를 발견하자마자 자책을 하며 오히려 차를 정비하고 부리나케 다시 돌려놓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 '질'과 쌍둥이 아들인 '윌'과 '필'이 있다. 순종적인 윌과 비교해서 필은 청개구리였는데, 평소에 부모님 몰래 안전벨트를 풀던 필은 고장 난 신호등 때문에 일어난 교통사고에 목숨을 잃는다. 이후, 아버지 제프의 삶은 송두리째 부서진다.


그가 비극을 소화해 내는 방식 때문이다. 제프는 일반인이 아니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되려 아들의 죽음이 분명 의미가 있다며 프로그램으로 필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한다. 기존에 다루던 어린이가 지켜야 하는 '덕목'대신, 죽음과 같이 어른이 어린이에게 전달하기 꺼려하지만 삶을 살며 마주해야 하는 여러 '진실'에 대해 나누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죽음에도 초연하게 일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프를 보며 실망한 아내는 그를 떠난다. 남은 아들 윌 또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삐뚤어지고, 죽은 쌍둥이 형제인 필처럼 변한다. 프로그램의 기획을 맡은 제프의 아버지인 '셉'은 사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컨텐츠를 고집하는 제프를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 한다. 오직 제프의 누나인 '디디'만이 망가져가는 제프와 그의 주변인들 사이를 동분서주하지만, 점점 지쳐간다.

삶의 큰 비극 속에서, 기존에 사회에서 인정받고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제프의 삶의 방식과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되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참 슬픈데, 킨츠키라는 에피소드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일본에서 온 수습생인 '피클스상'이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은 글로벌 프랜차이즈화 되어 필리핀, 일본, 아프리카 등 다양한 나라에 현지 버전의 피클스 아저씨가 있다) 디디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둘은 가까워지게 된다. 대화가 깊어지며 디디가 본인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피클스상이 킨츠키에 대해 말한다.


"킨츠키를 아세요? 특별한 물건을 부서트리고 그걸 다시 금으로 붙이는 예술 기법이죠.

당신의 흉터는 당신이 부서졌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치유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부서진다는 건 동시에 치유예요."


그 사이 여러 악재를 감당하지 못한 제프는 결국 무너져버리고 아버지의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부서진 TV에 비친 그의 얼굴이 마치 킨츠키 공예품처럼 보이는 것이 압권이다. (지극히 공드리스러운 연출. 종국에는 그가 치유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킨츠키를 연상시키는 박살 난 TV와 무너진 제프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은 물론 제프의 상황만큼 극단적이지 않다. 그런 건 차치하고, 멘탈이든 커리어든 관계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 항상 무언가가 부서져있던 2024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파편을 이어 붙인다면, 킨츠키 공예처럼 경험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안 좋은 기억이었다고 치부하기엔 많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2025년의 시작부터 또 다른 응어리가 질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시간, 그리고 공을 들여야겠지만, 붙일 수 있는 것들은 다시 붙여놓는다면,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25년 첫 주말, 몇 번이고 봤던 키딩을 다시 한번 보려고 한다. 나 자신이 잘 되었음 하는 마음보다 타인이 잘 되었음 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경험은 매우 흔치 않은데, 키딩은 그 어려운 것을 가능케 한다. 이터널 선샤인에 이어 미셸 공드리와 짐 캐리가 만든 또 다른 '킨츠키'인 셈이다.


정말.. 꼭 봐야 할 인생 미드 0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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